임진왜란 동아시아 삼국전쟁 서평 (이순신의 기억에 대한 역사와 역사화를 중심으로)
- 최초 등록일
- 2021.05.20
- 최종 저작일
- 20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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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임진왜란 동아시아 삼국전쟁 서평 (이순신의 기억에 대한 역사와 역사화를 중심으로)"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기억의 역사
2. 조선왕조 시대의 이순신론
3. 식민지 시대의 이순신론
4. 이은상의 <국역주해 이충무공전서>와 민족의 태양 이순신
5. 1980년대 이후의 새로운 논의들
6. 맺음말: 임진왜란을 중심으로
본문내용
1. 기억의 역사
조선왕조에 있어 더없이 큰 사건인 임진왜란은 한국인에게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에 저항하기 위한 항일운동의 역사적 뿌리로 인식되기도 했다. 그러나 전체적인 전쟁의 양상을 볼 때 조선왕조는 거듭해서 패했기 때문에 항일운동의 역사적 뿌리로만 생각할 수 없다. 그래서 한국인에게 임진왜란은 이순신의 승전 위주로 기억되는 경우가 지배적이다. 이순신은 생중에도 사후에도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으며 정치권의 이익을 위해 도구적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순신에 대한 기억은 시대상황과 정치적, 이념적 성향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본서에서는 역사적 고찰을 통해 한국에서 임진왜란을 어떻게 인식해왔는지 또 그런 인식이 일본에 대한 한국인의 관념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2. 조선왕조 시대의 이순신론
1). 임진왜란 직후 논공행상과 <선조실록>을 중심으로
선조 31년 4월, 선조는 한산도 패배에 관하여 책임과 공의 여부를 조사해서 보고할 것을 지시했다. 이에 비변사에서 원균의 지휘 실패로 기습을 당해 조선이 패했기 때문에 그에게 모든 책임이 있다고 답했다. 그러나 선조는 원균에게만 모든 책임을 물을 수 없다며 그를 두둔했다. 이는 정유년 한산도 패배의 책임을 원균에게 묻는다면 이순신을 해임하고 원균을 적극 후원했던 서인과 선조의 입장이 곤경에 처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조는 원균을 옹호하는 것에 앞장선다. 한산도 패전에 대한 책임 주체 문제는 전쟁 중에 있던 상황 때문에 우선 가라앉았으나 이순신이 수군통제사로 복직되고 승전을 세우자 다시 수면위로 떠올랐다. 선조가 불복종의 명분으로 사형시키려 했던 이순신이 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이순신의 연승은 이순신을 원균으로 교체하고 패배의 결과만 낳은 선조에 대한 인책론으로 이어질 것이 당연했다. 따라서 선조는 왜란이 끝나고 반년이 흐른 뒤에도 이순신의 공을 인정하는데 주저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