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의 역사
- 최초 등록일
- 2012.09.02
- 최종 저작일
- 20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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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남한산성 일대는 남쪽으로부터 한양도성으로 가거나, 북쪽으로부터 한강이남지역으로 내려가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할 주요 길목의 하나이고 한강유역의 장악을 위해서는 반드시 선점해야 하는 지역이므로 삼국시대부터 국가의 운명을 좌우해온 급소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본문에서는 이러한 천혜의 전략적 요충지인 남한산성의 삼국시대부터 해방 후 현재까지의 역사를 알아보도록 하겠다.
목차
I. 서론
II. 본론
1. 삼국시대 및 통일신라시대의 남한산성
1) 백제의 하남위례성
2) 신라 주장성
2. 고려시대의 남한산성
3. 조선시대의 남한산성
1) 병자호란 이전의 남한산성
2) 병자호란 시기의 남한산성
3) 병자호란 이후의 남한산성
4. 일제 강점기의 남한산성
5. 해방 후 현재의 남한산성
III. 결론
본문내용
Ⅱ. 본론
1. 삼국시대 및 통일신라시대
남한산성의 최초 축성에 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남한산성이 백제의 시조인 온조가 세운 왕도인 하남위례성이라는 견해와 남한산성이 신라시대에 쌓은 주장성(일장성)이라는 견해이다.
1) 백제의 하남위례성
하남위례성을 남한산성과 연관 짓는 주장이 처음 제기된 것은 고려시대로1) 이후 이러한 견해에 대한 기록은 조선시대부터 꾸준히 제기되어 《조선왕조실록》,2)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餘地勝覽)》, 《대동야승(大東野乘)》, 《연려실기술》, 《여지도서(輿地圖書)》, 《대동지지》 등 대부분의 조선시대 지리 관련 자료에서 남한산성이 백제의 고성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한성으로 도읍을 옮긴 조선의 입장에서 한성이 국가의 수도로 적합한 곳임을 강조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의 저자인 홍경모만이 유형원의 《반계수록》을 인용하며 이런 주장을 반박하였으나3) 인정받지 못했다.4) 오늘날 학계에서는 최초의 백제 수도인 위례성으로 송파구에 있는 풍납토성을 강력하게 지목하고 있다. 그러나 2001년과 2002년에 걸쳐 토지박물관에서 남한산성의 행궁터를 발굴조사 하였는데, 이곳에서 백제의 유적으로 보이는 수혈과 화덕자리 그리고 토기조각들이 출토되어 백제시대에도 남한산성에 사람이 살았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아직 대대적인 시설이 발견되지 않아 도읍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으며, 계속 연구 중이다.
<중 략>
5. 해방 후 현재
남한산성도 한국전쟁은 피할 수 없어 성벽과 성내의 건물들이 파괴되거나 훼손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남한산성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했으나, 4·19 혁명 후에 수립된 제2공화국은 이를 무효화시켰다. 1971년 도립공원으로 재지정 되었고, 5년 후인 1976년 7월 1일 관리사무소가 개소했다. 1963년 1월 21일에는 남한산성의 성벽이 국가 사적 제57호로 지정되었다. 성벽 복원사업이 1975년부터 시작되어 1997년까지 성벽 5.1Km를 복원했다. 현재 성남시와 광주시 양 방향으로 남한산성을 관통하는 도로는 1974년에 완공되었다. 1999년에는 남한산성 역사관이 개장하고, 2010년에는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되었다.
참고 자료
1.《남한산성 품에 안긴 산성마을》, 전국문화원연합회, 한국향토사연구전국협의회, 1999.
2. 위키백과사전-‘남한산성’
[http://ko.wikipedia.org/wiki/%EB%82%A8%ED%95%9C%EC%82%B0%EC%84%B1]
3. 네이버 백과사전-‘남한산성’
4. 경기도 광주시청 홈페이지
[http://tour.gjcity.go.kr/n03_tour_cultural/cultural01_1.asp?location_code=20]
5. 남한산성과 병자호란, 이충휘 [http://hyangto.pe.kr/L16-R21.htm]
6. 《역사현장 남한산성 건축의 가치와 그 해석- 행궁터의 통일신라시대 유적 중심으로》, 장경호, 한울문화재연구원
7. 《남한산성의 축성법》, 이천우, 문화재청
8. 《남한산성 성곽의 특징》, 심광주, 토지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