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황과 이이] 이황과 이이의 교육사상 비교
- 최초 등록일
- 2009.09.16
- 최종 저작일
- 20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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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지난 한 학기 동안 열심히 작성한 A+ 레포트입니다.
목차
1. 퇴계 이황의 생애
2. 이황 교육사상의 현실적 기반
3. 퇴계 이황의 교육자로서의 모습
4. 이황의 교육관과 교육방법
5. 퇴계 교육학의 본원적 목적
6. 퇴계 교육학의 방법론적 성격
7. 퇴계 교육학의 사상적 특징과 현대적 과제
8. 율곡 이이의 생애
9. 율곡 이이의 교육목표
10. 율곡 이이의 교육동기
11. 이이교육의 이상적 인간상
12. 교육으로의 변화 가능성
13. 율곡 교육의 교육과정
14. 율곡의 교육방법
15. 이이의 교사론
16. 율곡 교육사상의 현대적 의미와 그 영향
17.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의 교육사상 비교표
18. 참고자료
본문내용
1. 퇴계 이황의 생애
퇴계 이이의 성은 이씨이고 이름은 황(滉), 자는 경호(景浩)이다. 28세(1528)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33세에 재차 성균관에 들어가 김인후와 교유하고 《심경부주》를 입수하여 크게 심취하였다. 이해 귀향도중 김안국을 만나 성인군자에 관한 견문을 넓혔다. 34세(1534)에 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부정자가 되면서 관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37세에 내간상을 당하자 향리에서 3년간 복상하였고, 39세에 홍문관수찬이 되었다가 곧 사가독서)에 임명되었다. 중종 말년에 조정이 어지러워지자 먼저 낙향하는 친우 김인후를 한양에서 떠나보내고, 이 무렵부터 관계를 떠나 산림에 은퇴할 결의를 굳힌 듯, 43세이던 10월에 성균관사성으로 승진하자 성묘를 핑계삼아 사가를 청하여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을사사화 후 병약을 구실삼아 모든 관직을 사퇴하고, 46세(1546)가 되던 해 향토인 낙동강 상류 토계의 동암에 양진암을 얽어서 산운야학을 벗삼아 독서에 전념하는 구도생활에 들어갔다. 이때에 토계를 퇴계라 개칭하고, 자신의 아호로 삼았다. 그 뒤에도 자주 임관의 명을 받아 영영 퇴거해버릴 형편이 아님을 알고 부패하고 문란된 중앙의 관계에서 떠나고 싶어서 외직을 지망, 48세에 충청도 단양군수가 되었으나, 곧 형이 충청감사가 되어 옴을 피하여 임명 전에 청하여 경상도 풍기군수로 전임하였다.
풍기군수 재임중 주자가 백록동서원을 부흥한 선례를 좇아서, 고려 말기의 주자학의 선구자 안향이 공부하던 땅에 전임군수 주세붕이 창설한 백운동서원에 편액․서적․학전을 하사할 것을 감사를 통하여 조정에 청원하여 실현을 보게 되었는데, 이것이 조선조 사액서원의 시초가 된 소수서원이다. 1년 후 퇴관하고, 어지러운 정계를 피하여 퇴계의 서쪽에 한서암을 지어 다시금 구도생활에 침잠하다가 52세(1552)에 성균관대사성의 명을 받아 취임하였다. 56세에 홍문관부제학, 58세에 공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여러 차례 고사하였다. 43세 이후 이때까지 관직을 사퇴하였거나 임관에 응하지 않은 일이 20수회에 이르렀다. 60세(1560)에 도산서당을 짓고 아호를
참고 자료
우리에게 있어서 이퇴계는 누구인가, 김유혁, 항산문고
교육사상사/ 이원호 / 문음사
황의동, 한국의 유학사상, 서광사
율곡의 사상, 김영수, 일신서저출판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