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황의 교육사상
- 최초 등록일
- 2011.12.03
- 최종 저작일
- 20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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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이황의 교육사상에 대해 레포트작성한것입니다
목차
Ⅰ.서론
- 이황의 생애
Ⅱ. 본론
1. 이황의 사상
(1) 이기론
(2) 인식론
(3) 사단칠정론
2. 시대적 배경
3. 이황의 교육자로서의 모습
(1) 교육관
(2) 교육방법
Ⅲ. 결론
Ⅳ. 참고문헌
본문내용
이황은 1501년(조선 연산군 7년) 경북 예안현(오늘날의 안동시 예안면)에서 이식의 7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마흔 살의 나이로 사망하여, 이황은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야 했다. 이황은 열두 살 때부터 숙부인 송재 이우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송재는 그때 관직에 있었는데, 바쁜 일과 중에도 퇴계를 가르쳤다. 1528년(중종 23)에 소과에 입격하고 1533년(중종 28) 성균관에 들어가 이듬해인 1534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정자·박사·전적·호조좌랑을 거쳐 1539년(중종 34)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 그 후 승진을 거듭하여 성균관 사성이 되었으나 사직하고 고향에 들어가 학문을 연마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 다시 불러 다시 홍문관 교리를 지내고 1545년(인종 1) 전한이 되었다.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화를 입어 한때 파직되었다가 복직하였으나, 이미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을 때이므로 사직하고 고향에 내려가 양진암을 짓고 학문에 몰두하였다. 일찍 그가 서울에 있을 때 《주자전서》를 읽고 여기 몰두하여 성리학을 연구하여, 마침내 대성하여 “동방의 주자”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으며 이로부터 사방에서 학자들이 모여들어 학문을 배웠다. 비록 조정의 부름이 있더라도 관직에 오래 머물지 않고 부득이한 경우에는 외직을 자청하였다. 명종 초에 단양·풍기 등의 군수를 역임한 것도 이 때문이다. 1550년 풍기 군수 시절에 소수서원(당시 백운동서원) 사액을 실현시켰다. 1552년(명종 7) 다시 소환되어 홍문관 교리·대사성·부제학·공조참판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1555년(명종 10) 고향으로 돌아갔다. 앞서 풍기 군수의 직을 버리고 고향에 내려왔을 때 그는 한서암을 짓고 1555년에는 최초의 사액서원인 도산서원을 지어 학문과 사색의 생활을 계속하였다. 이이가 그를 방문한 것도 이때의 일이며, 명종이 그가 관직에 나오지 않음을 애석히 여겨 화공에 명하여 도산의 경치를 그려오게 하여 완상한 것도 이때의 미담이다.
참고 자료
『퇴계의 생애와 사상』 - 이상은, 서문당, 1973
『철학사전』 - 임석진 외 편저, 중원문화, 2009
『퇴계학보』 - 배종호, 퇴계학연구원,1981
『한국의 인간상』 - 박종홍, 신구문화사, 1971
『퇴계(退溪)의 교육철학(敎育哲學)』 - 정순목, 지식산업사, 1971
논문 - 퇴계이황의 교육사상과 존 웨슬리의 교육사상 비교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