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 조식
- 최초 등록일
- 2017.04.19
- 최종 저작일
- 20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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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머리말
ⅱ. 조식의 생애
ⅲ. 조식의 사상
ⅳ. 남명의 영향을 받은 제자들
ⅴ. 맺음말
ⅵ. 참고문헌
본문내용
ⅰ. 머리말
명종시기 사회가 문란하고 도적이 난립할 당시 조정대신들은 성리학을 등용을 위한 목적으로만 생각할 때 그들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배운 것을 현실에서 적용 및 실천하는 선비가 있었다. 그가 바로 사림의 정신적 지주였던 남명조식이다.
그는 일생을 초야에서 보냈지만 결코 현실을 망각한 은둔자는 아니었다. 그는 올곧은 선비적 기풍을 가졌으며 불의를 참지 않았으며 정치적 폐단을 수차의 상소와 간언을 통해 반드시 시정하고자 하였다. 또한 당대 영남학풍의 세력이었던 이황과는 별개로 이론에 집착하지 않고 실천적 경향을 띄면서 남명학파라는 고유의 학파를 형성하면서 경敬 · 의義라는 그의 실천적 사상을 습득한 많은 인재들을 배출하게 된다. 그리고 실천적 기풍을 물려받은 제자들이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본고에서는 남명조식을 중심으로 하여 당대 성리학자들과 달랐던 그의 사상과 그가 세상을 어떤 식으로 바라보았는지 또한 경상도 등지에서 발현한 남명학파의 주요 인물들과 그들의 행적을 살펴봄으로써 조선사대부로써 남명조식이 바랬던 조선사회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살펴보겠다.
ⅱ. 조식의 생애
남명 조식은 조선조 연산군 7년(1501) 6월 26일 경남 합천군 삼가면 토동(兎洞)에서 아버지 조언형(曺彦亨)과 어머니 인천 이씨 사이의 3남 5녀 중 2남으로 태어났다. 5세 때까지 외가에서 자라면서 아버지가 장원급제하고 벼슬길에 오르자 서울로 이사해 아버지로부터 문자를 배웠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부귀와 재물을 초개(草芥)처럼 보며 항상 탈세속적 기상을 가졌다. 일찍이 과업(科業)과 과문(科文)에 몰두하여 소대과(小大科)의 초시와 본시에 응시했지만 본시에서 합격하지 못했고, 33세 때와 37세 때 다시 한 번 향거(鄕擧)에 나아가 장원했으나 회시에는 합격되지 않자 어머니를 설득하여 과업을 비로소 포기하고 학문에만 전념하게 되었다.
38세 때 경상감사 이언적과 이림의 천거를 거절하고 문인들과 함께 지리산 신응사(神凝寺)에서 강학하였다.
참고 자료
「영남학파와 남명조식」, 이수건, 동방한문학회, 1995.
『한국의 사상가 10人 남명조식』, 오이환, 예문동양사상연구원, 2003.
「남명 조식 교육사상의 사회과교육적 고찰」, 이재현, 한국사회교과교육학회, 2009.
「남명 조식의 현실적 사회개혁론」, 이미림, 한국철학사연구회, 2012.
동영상제공: Youtube 〈천지매거진〉, 선비의 발자취-남명조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