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말기에서 고려 전기의 경제 변동
- 최초 등록일
- 2011.12.06
- 최종 저작일
- 20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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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신라 말기에서 고려 전기의 경제 변동 에 대한 개괄 원고 입니다.
목차
신라 말기에서 고려 전기의 경제 변동
- 전시과 제정의 의의와 한계-
1. 신라 말기의 정치적 갈등과 경제 변동
1.1 지배층의 분열과 호족세력의 대두
1.2 장원(莊園)적 토지소유의 확대
1.3 8-9세기 전국적인 규모의 수리 사업
1.4 농민층의 도적 봉기와 농민항쟁
2. 후삼국의 지배세력과 통치 이념
2.1 견훤과 궁예
2.2 왕건의 통치이념과 유교적 정치관의 수용
3. 고려의 건국과 유교적 통치이념의 확립
3.1 호족 억압정책과 중앙집권의 강화
3.2 유교적 통치이념의 도입
3.3 정치사회론 : 중앙집권적 귀족정치
4. 고려 전기의 권농정책과 농업생산력의 발전
4.1 권농정책
4.2 한전 농업
4.3 수전 농업
4.4 의창제도의 정비
5. 토지소유의 발달과 田柴科의 제정
5.1 토지소유와 지주-전호제의 성립, 양전제도의 발달
5.2 전시과의 제정과 운영 - [역분전에서 전시과로]
5.2.1 전시과의 제정
5.2.2 전시과의 운영
5.3 수취제도
6. 신라 말기에서 고려 전기의 경제 변동 - 전시과 제정의 의의와 한계 -의 요점
본문내용
※ 의창제도의 역사적 변천
- 고구려 고국천왕대(194년)의 진대법(賑貸法) : 춘궁기 대여, 추수기 회수
- 고려 태조가 흑창(黑倉)을 설치해 궁민에게 진대하는 법을 마련, 986년(성종 5)에 이름을 의창(義倉)으로 바꾸고 지방 주군에까지 확대
- 993년에는 양경(兩京) 및 12목(牧)에 상평창(常平倉)을 설치, 천금(千金)을 내어 그 절반액에 해당하는 포(布) 32만 필을 상평창에 두었다가 물가 조절에 사용하고, 나머지 절반액에 해당하는 쌀 6만 4000석을 양경 및 지방 15개 의창에 배분해 개경에서는 궁민에게 대여하고, 지방에서는 빈민을 구호하는 데 사용.
- 고려의 의창은 이자곡을 회수하지 않고, 포환곡 등의 부족분을 국가가 보충함. 보충방법으로는 1023년(현종 14)에 잠시 시행된 연호수미법(煙戶收米法: 전토를 소유한 가호로부터 1결에 1∼3말〔斗〕씩의 미곡을 징수해 의창에 귀속시켰던 제도) 등.
- 고려의 의창제도는 무신 집권과 몽고의 침입 등 혼란기를 겪는 동안 완전히 괴멸되어, 고려 말기 공민왕 때 의창을 다시 설치하기로 결정, 1389년(창왕 1)에 양광도(楊廣道)에 이를 설치하고, 1391년(공양왕 3)에는 개경의 5부(部)에도 설치함.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