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세사 앞부분
- 최초 등록일
- 2010.07.24
- 최종 저작일
- 20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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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근세사(조선) 내용 중 앞부분입니다.
목차
고려 말의 상황
건국 초의 시련(1,2차 왕자의 난)
계유정난(1453)
원상제도(院相制度) - 왕권과 신권의 세 번째 충돌, 연산군 시기
사림의 등장
훈구와 사림의 대립
본문내용
고려 말의 상황
대개 31대 공민왕 때부터를 고려 말이라고 한다. 또 이 시기부터 조선 건국의 과정이 시작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고려 후기에 이르러 사회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원 간섭기라고도 볼 수 있는 이 시기에는 왕권이 약화되었고 권문세족이 특권 세력으로 등장하고 대토지를 소유하는 현상이 일어났다. 이 시기에 즉위한 공민왕은 반원자주개혁과 왕권강화정책을 꾀했다. 당시 대외적으로는 원나라가 붕괴해가고(내부반란, 후계자 계승문제, 환관들의 횡포) 명나라라는 새로운 한족왕조가 들어설 무렵이었다. 대외적인 변화를 이용하여 공민왕은 기철 일파를 숙청하였으며 몽고풍을 폐지하고 원에 보내던 조공을 끊도록 하였다. 왕권강화책으로는 귀족세력을 억압하고자 하였으나 당시 권문세족들의 반발로 잘 시행되지가 않았다. 이 무렵에 공민왕의 개혁을 적극적으로 후원하던 노국공주가 사망하자 그의 개혁은 차질을 빚게 되었다. 이에 공민왕은 승려 신돈을 개혁기구인 전민변정도감의 장을 맡고 운영케 하였다. 그러나 권문세족의 반발로 신돈은 죽임을 당하였고 개혁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으며, 공민왕도 곧 죽임을 당하였다. 공민왕의 뒤를 이어 우왕이 즉위했는데 그의 출생에 관해서는 정확하지가 않다. 일설에는 신돈이 집권 후 여종 반야를 공민왕에게 바쳤고 후에 반야가 모니노(훗날의 우왕)를 낳았는데 이후 비밀 유지를 위해 반야가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고 한다. 어쨌든 이 모니노가 우왕으로 즉위하였다. 우왕이 즉위하게 되면서 고려 조정은 친원파와 친명파로 갈라져 대립하게 되었다. 두 세력 다 고려의 재건이라는 동일목표를 갖고 있었으나 방법 차이로 인해 갈라서게 된 것이었다. 이 무렵 홍건적, 왜구와의 전투에서 이성계를 대표하는 신흥무인세력이 성장하게 되었다. 이성계가 급성장하게 된 데에는 여진족의 도움(ex.이지란)도 컸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명과 고려는 초반부터 불편한 관계를 가졌다.(명나라 사신 살해문제부터) 급기야는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