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단군릉 앞에서 우리는 어떤 상상을 할 것인가? 5장. 고조선은 대동강 유역에 있었나? ... 뼈일 가능성도 있다.국내 학자들은 북한의 단군릉 발굴 발표가 정치적 목적에 의해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 그러므로 단군릉을 포함하여 고조선에 관한 논쟁들은 청소년들에게 역사적 상상력을 키워주는 좋은 교육 자료가 될 수 있다.
은근히 ‘단군릉이 사실이 였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가진 체로... 북한학계에서는 이미 이 단군릉을 사실로 받아들였고 모두가 인정할 만한 증거도 있다. ... 지금 이렇게 분단이 되지 않았다면 단군릉에 대해서는 우리나라 교과서에 빽빽이 기록되었을 것이다. 아쉬웠다. 분단이 되어있는 이 현실.
발견되었고 북한이 단군릉 준공식을 거행했을 때, 학술적 근거가 없는 것임에도 일부 남한학자들은 이에 덩달아 찬성하는 모습을 보였다. ... 이러한 독단의 위험성은 현재 일본 극우주의자들이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으며 ‘환단고기’와 같이 검증되지 않는 학설을 주류로 믿게 되는 모습에서 잘 보여진다. 1993년 개천절 북한에서 단군릉이
단군릉이 고구려양식인 이유는 고구려시대에 무덤을 개축했기 때문이라고 설명될 수 있다. ... 단군릉에서 발견된 가장 중요한 내용물은 86개에 달하는 남녀의 유골이다. 넓적다리뼈, 손뼈, 갈비뼈 외에 팔다리뼈와 골반뼈 등이 나왔다. ... 발굴한 단군릉은 석조로 된 고구려양식의 무덤으로 관을 안치한 무덤칸은 가로 2백73cm, 세로 2백76cm이고, 천장높이는 1백60cm이다.
단군릉 1993년 북한 평양지역에서 단군의 묘지라고 주장하는 무덤이 발굴 되었다. ... 이런 의문점들이 제기 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북한 측은 단군릉을 부분 개방할 뿐 아니라 취재를 함에 있어서도 재한적인 면이 많았다고 한다. ... 하지만 단군릉이라는 북한의 주장에는 한계점이 있다. 첫째, 북한은 이미 1993년 이전에 ‘물질문화 보존 위원회’ 라는 단체에서 동명왕과 함께 발굴한 바 있다.
단군, 신화와 역사 - 단군릉을 중심으로 (1) 연구 동향 ① 단군릉의 실재 1993년 9월 28일 석간신문에 평강 근처에서 ‘단군릉’을 찾았다는 북한의 기사가 실렸다. ... 이에 단군릉의 복원이 그 계기의 일환으로 준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북한의 단군릉 복원 및 단군 민족주의 강조는 주체적 민족주의라는 측면으로 이해 가능하다. ... 단군, 역사와 신화 - 단군릉 사건을 중심으로 (1) 연구동향 (2) 교과서 분석 (3) 수업 속에서의 역사 3.
현재 평양직할시에 재건되어 있는 단군릉의 사실여부에 대해서 남한학계는 비판적인 입장을 보인다. ... 북한학계는 본래 광복 이후 ‘단군신화는 꾸며진 건국신화일 뿐이다’라는 의견이었으나, 1994년 단군릉을 발굴할 무렵부터 입장을 바꾸어 ‘단군은 한민족 최초의 지배자로 그 출생,건국,
그중에서도 평양에서 발굴된 단군릉과 동명왕릉을 가지고 북한과 남한의 역사적 인식차이를 살펴 보도록 하자. 2.본론 (1)단군릉 북한의 평양에서 단군릉이 발굴됐다. ... 평양에 있는 단군릉은 문헌적인 근거로 보았을 때 남한에서도 단군릉이라는 것에는 의견이 없지만, 그 유물의 해석에서는 남북한 심한차이를 드러낸다. ... 단군릉은 남한과 북한간의 많은 의견이 대립되어 있다.
결국 북한이 주장하는 단군릉은, 누가 보아도 ‘단군릉’이 아님이 확실해졌다. ... 북측에서는 이에 대해, 고구려 시대에 단군릉을 1차 발굴하여 원래의 단군릉을 고구려 양식으로 새롭게 단장하고 금동관을 씌워 재 매장 해 주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 설령 고구려인들이 단군릉을 개축했다 한들, 국가와 민족의 시조가 묻힐 무덤을 그렇게 작게 만들었을 리가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