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라서 단군릉은 단군신화를 사실로 입증해줄 결정적 자료가 되지 못한다. ... 북한학계가 단군릉 발굴 과정에서 요동중심설을 뒤엎은 데에는,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주체사상의 강조한 당시 상황이 주효했다. ... 이는 단군릉복원(1993년) 이전의 단군신화로 표현된 이후의 시기를 대상으로 한 고조선사의 내용과 1920~30년대의 민족주의사학자들의 견해를 결합시킨 것으로, 단군신화를 사실로 인정하는
역사스페셜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단군릉의 발견이다. 1993년 평양시 강동군 대박산 기슭에서 '단군릉'이 발굴되었고 무덤 내에 있는 인골은 전자상자성공명법에 의해 연대측정을 하니 ... '단군릉발굴보고'를 발표하여 단군이 5,011년 전의 실존 인물이라고 주장하였다.
즉 단군릉 건립 연대가 기원전 3000년 이전으로 추정되므로 고조선 건국시기 역시 단군신화를 통해 추정한 연대보다 더 오래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 북한에서는 1990년대에 들어와 단군릉을 발견한 이후 고조선의 국가 출현 시점이 상향 조정된 결과, 고대 전후의 시대사 편년 규정이 연속적으로 조정되었으며 특히 청동기 문화의 출현
남한의 학자들은 대동강변에 출토되는 유물로 비추어 한때나마 수도였다는 것은 인정하고 있지만 평양설과 단군릉에 대한 것은 부정의 논지를 견지하고 있다. ? ... ? 삼국유사에는 단군왕검이 평양에 도읍을 정했다는 기록이 있다.?평양은 단군에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구체적인 지명이다.
단군릉 발굴-본토에서 기원한 우리 민족의 원시조 북한 역사학의 위기 단군릉은 원래 평양시 강동군 대박산 기슭에 있던 석실봉토분이다. ... 단군릉 발굴과 이어지는 북한 학계의 동향으로 특별하게 주목되는 사실은, 단군은 곧 우리 민족의 원시조 라는 새로운 개념을 정립하려는 노력이다. ... 무덤이 고구려 때 양식인 것은 고구려 때 무덤을 改葬했기 때문이라고 풀이하였다. 1993년 초의 이 단군릉 발굴과 단군유골 발견은 북한 학계의 단군관련 연구분위기를 바꾸었다.
본격적으로- 1부를 중심으로 1993년 북한이 평양시내에 단군릉을 발견했다고 발표함으로서 역사학계에서는 단군릉 진위여부에 대하여 논란이 일었다. ... 북한은 단군릉을 내세우는 이유는 북한이 처한 현실의 상황에 대한 이해를 통해 알 수 있다. ... , 단군릉이 고구려식 벽화로 내부에 장식이 되있는 것등 여러 가지 북한측의 주장에 모순점이 발견되었다.
무덤이 고구려 양식인 것은 고구려 때(4~5세기경) 단군릉이 개축되었기 때문이다. 단군릉 발굴로 그 전까지 통설로 인정되었던 주장들이 오류였음이 증명되었다. ... 북한 학자들이 이 무덤을 단군릉이라 확정하게 된 이유는 세가로 나누어 요약할 수 있다. ... 단군릉 발굴 전에는 단군이 죽은 곳은 요동지방이며,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도 요동지방에 있었다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제 3기는 단군릉이 발견되는 1993년부터 현재에 이르는 시기이다. 1993년에 단군릉이 발견되면서부터 북한은 재 평양설을 주장한다. ... 그리고 이 단군릉은 연대 측정결과 5천년전의 것이라고 주장을 하며, 16C의 것인 신증동국여지승람과 환단고기를 사료로 연구하고 있다. ... 북한의 단군릉에 대한 주장에 대해 남한측이 고구려의 것이라고 추정을 하니 북한에서는 고구려의 사람이 단군을 숭배해서 개장했다라고 반박하기도 하였다.
먼저 북한학계에서 주장하는 대동강 중심설은 단군릉과 또한 그곳에서 발견되는 청동기 유물들을 근거로 하고 있는데, 단군릉은 아직까지 '발견된'것인지, 아니면 정치 사회적 논리에 따라 ... 최근 북한 학계는 단군릉의 발굴로 인해 요동중심설에서 대동강 중심설로 급선회하는 중이며 송호정 등 우리학계의 일부도 여기에 동조하고 있다. ... 첫째, 과거 사회에서는 왕들의 무덤을 수도 부근에 쓰는 것이 관례이기 때문에, 단군릉이 실제적인 단군의 무덤이라는 것이 확증된 이상, 당연히 평양이 고조선의 중심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