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조의 정책
- 최초 등록일
- 2007.12.11
- 최종 저작일
- 20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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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중국 삼국시대 조조의 획기적인 정책 세 가지를 서술했습니다.
목차
조조의 정책 첫 번째 - 둔전제
조조의 정책 두 번째 -세제의 변화-호조제(戶調制)
조조의 정책 세 번째 - 병호제(兵戶制)
본문내용
조조(曹操)는 난세의 간웅이라 불리며 삼국지연의 안에서는 주인공 격인 유비(劉備)에 맞서는 반대 역으로 나온다. 하지만 위가 그렇게 삼국 중에서 강성했었던 이유는 조조의 노력에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조조가 그렇게 빨리 두각을 나타내고 기반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시대에 맞는 시스템을 빨리 만들고 그걸 앞장서서 정착시킨 데 있다.
당시 백성들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은 생활 안정이었다. 계속된 전란 때문에 백성들은 안전한 삶터와 생업을 바랐던 것이다. 이것을 위해 조조가 한 것이 둔전제였다.
조조의 정책 첫 번째 - 둔전제
둔전제는 전란으로 버려진 농토를 나라에서 모아 백성들에게 농사용으로 빌려주고 수확량의 6할을 징수하는 국영 소작제도다.
후한 말 농민반란이 일어나고 이에 대한 통치계급의 진압 그리고 통치계급 내부의 대립과 같은 소용돌이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유민화(流民化)하여 양전(良田)이 황무지로 바뀌고 인적조차 드문 상태였다고 《진서》 <식화지>는 서술하고 있다.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군웅들의 대부분이 이런 군량을 포함한 재정 문제가 급박했었다. 조조도 예외는 아니였고 조조는 이런 현실적 요청에서 전한 이래 시행했던 둔전을 모델로 하면서 새로운 시대적 요청에 맞게 변형된 이른바 ‘조조의 둔전제’라는 정책을 채택, 시행하였다. 조조의 둔전제 설치 연대는 동탁 잔당세력의 손아귀에서 빠져 나와 갈 곳 없는 한의 헌제를 자신의 근거지인 허[허창]에 영입한 건안 원년(196)이다. 이때 조기(棗祗)와 한호(韓浩)의 건의에 따라 둔전제를 실시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이때의 군장들은 군량을 확보하고 동시에 전란으로 생긴 유민을 토착화하고 기민(饑民)을 구제하고 또 그 노동력을 병력으로 전용(轉用)할 수 있는 다목적의 토지경영방법을 창안한 것이다. 후한 말 중원지방에서 전투가 격화됨에 따라서 군량의 병력확보를 위한 군사적 기능을 겸하는 농경조직이 시대적 필요에서 생겨난 것이며 이것이 곧 조조의 둔전제이다. 여남 ․ 영천의 황건군을 격파하여 이때 항복한 병사와 포로를 노동력으로 하고 이들에게 경우(耕牛)와 농구를 빌려 주기도 하고 또 백성을 모집해서 수도인 허 부근에 처음 둔전을 설치하여 곡(穀) 1백만 곡(斛)을 수확하였다고 한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