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이황과이이비교
- 최초 등록일
- 2006.12.15
- 최종 저작일
- 20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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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이화과 이이의 사상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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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개인적으로 퇴계이황과 율곡이이는 정치보다는 문학인으로서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의 사상을 들어 본적이 있지만 부끄럽게도 그들의 정치는 이번에 처음 접한 것이 사실이다. 구산구곡가의 작가로 알고 있는 이이와 도산십이곡의 작가로 알고 있는 이황 이 두학자가 정치적인 측면에서도 큰 업적을 남긴것을 알게되었다. 이들의 문학적인 학문과 정치사상을 보고 한국 역사에 있어서 큰 인물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이는 시대에 따라 마땅히 행하여야 할 일이 각기 다른 것이라 하였다. 그는 ‘창업(創業)’과 ‘수성(守成)’ 그리고 ‘경장(更張)’의 과정으로 나누어 논하였으며, 당시를 경장기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이는〈동호문답〉에서 가장 큰 폐법으로 다섯 가지를 들어 설명하였다. 그것은 모두 민생에 관계되는 것으로서, ① 일가절린의 폐, ② 진상번중의 폐, ③ 공물방납의 폐, ④ 역사불균의 폐, 그리고 ⑤ 이서주구의 폐를 꼽았다. 이것은 당시의 시대상과 민중의 질고(疾苦)를 가장 잘 나타낸 것이었으며, 그는 국세조사와 같은 전국적인 규모의 조사를 실시하여 실정에 알맞게 폐법을 개혁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이이의 변통론에서 ‘변통’이란 원래 주역에 보이는 것으로서, 그 바탕에는 수시변역의 논리가 있다. 이 수시변역이란 기본적으로 모든 만물은 때를 따라 변화한다는 것으로 인간의 역사적 상황 역시 시대를 따라 변화한다는 시간상의 개별성을 말하고 있다. 율곡은 이러한 역사인식 위에서 정치에서도 때를 아는 것, 이른바 시의를 파악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중요하다고 보고있다. 현실을 직시하고 그 시대의 현실에 합당한 도리 내지 요청하는 이상이 무엇인지를 간파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시의라는 것은 “때에 따라 변통해 법을 만들어 백성을 구하는 것”으로서 그 시대의 상황에 맞는 올바른 도리나 이법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이는 국정을 도모함에 있어서도 일개인이나 일부 지도층으로부터 하향식으로 수행될 것이 아니요, 언로를 개방하여 국인은 다 말할 수 있고, 위정자는 중지를 모아야 한다고 보았다. 조광조에게 있어서도 그러하였지만, 이이에게 있어 언로의 확대는 개혁의 방법이며 국가흥망에 관계되는 중대한 일로서 강조되었다. 공론은 국인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니 국인의 정당한 일반의사가 곧 국시가 된다. 여기에서 언로의 개방성과 여론의 존중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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