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사회학]교육사회학적 관점으로 본 소설 괭이부리말 아이들
- 최초 등록일
- 2006.10.12
- 최종 저작일
- 20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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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이 아이들을 어쩌지, 어떻게 해야 하지.’
“괭이부리말 아이들”을 읽고 난 후, 영호가 명환이를 업고 뛰면서 한 마음속의 외침이 계속해서 내 마음을 때렸다. 소설 “괭이부리말 아이들”은 동시대 우리 가운데 있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에 대한 이야기다. 어쩌면 나는 그 동안 명희와 같은 이유로 교사가 되기 위해 달려왔는지도 모른다. 좋은 학교로 가서 똑똑하고 가능성 있는 아이들을 만나기 위해서 말이다. “괭이부리말 아이들”을 만나고 명희가 변해가면서 나의 사고의 틀 또한 변하는 것을 느꼈다. 소설을 읽는 내내 나는 내가 교사가 되려 하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야 했다. 내 눈에 보이기 시작한 현실 속의 괭이부리말 아이들을 나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명희는 전형적인 기능론적 패러다임의 소유자였다. ‘5화 숙자와 담임선생님의 비밀’편 에서 명희는 어릴 적 ‘구질구질한’ 괭이부리말을 공부를 통해 벗어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말하고 있다. 교육을 통한 균등한 기회 속에서 오직 개인의 능력과 노력에 의해 상위 계층을 얻을 수 있다는 업적주의 사회관은 여기서도 적용된다. 노력한 자는 평등하게 그에 맞는 사회적 계층을 갖게 된다는 명희의 생각은 괭이부리말 사람들을 실패 자로 보게 만들었다. 또한 명희가 말한 오빠의 성공한 모습은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간 것이었다. 고학력을 얻는 것은 높은 지위 획득의 수단이 된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나타내는 부분이다. 이것은 동수와 영호의 대화에서 더 분명하게 들어난다. 학교를 가지 않고 학원에서 기술을 배우겠다는 동수에게 영호는 졸업장이 있어야 취직할 수 있다고 말한다. “니가 필요한 게 아니라 사회가 그걸 요구한다니까.”(2권 p.18) 이것은 사회가 요구하는 역량 있는 사람이 바로 학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곧 학교는 기능을 배우기 위한 곳이 아닌 학력 습득의 수단인 것이다. 계속해서 명희는 동수를 도와달라고 찾아온 영호에게 그런 문제 아이들은 가능성이 없으며 관심을 갖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학교제도에 잘 적응하면 착한 아이이고 적응하지 못한 아이들은 나쁜 아이-낙오자-라는 것이다. 명희의 이러한 태도는 동수를 매우 불편하게 만든다.
참고 자료
괭이부리말 아이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