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항쟁]제주 4.3의 역사적 의미
- 최초 등록일
- 2006.07.28
- 최종 저작일
- 2006.07
- 3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000원
소개글
제주 4.3의 역사적 의미에 고찰에 관한 레포트 입니다.
목차
없음
본문내용
제주 4.3항쟁은 한반도의 축도였다. 1945년 8월 해방이 되었을때 어느곳보다 제주도는 좌우가 연합하여 치안을 자치적으로 수행하는 등 해방의 맛을 누리며 활동하였다. 남로당의 4.3의 봉기에 제주도민이 어쩔수 없이 따랐든 동조를 한 것은 1947년 3.1시위와 3.10 관민 총파업 이후 외지 경찰과 서원들이 대거 투입되어 고문 감금 테러를 하고 금품을 빼앗고 강간을 하는 등 만행을 저지른데 대한 울분이 쌓여 있었고 한민족으로서는 용납하기 어려웠던 단독선거가 치러지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해방의 기쁨 속에서 자치활동을 벌인것이나 친일경찰과 청년단의 억압과 테러에 시달린 것은 육지도 마찬가지였고 그래서 항쟁 또는 소요나 폭동이 발생하였다. 분단에 대한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제주도에서 그러한 현상이 더 강하게 일어났을 뿐이었다. 이점에서 제주도는 한반도 현대사의 축도 였다. 남로당의 모험주의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학살 또한 제주도에서 훨씬 심하게 자행되었지만, 한국전쟁 이전이건 이후건 육지에서도 있었다.
그런데 일제가 만주나 중국 등지에서 삼광작전, 등의 이름으로 저지른 초토화작전과 유사한 제주도에서 초토화작전은 반 문명적. 반인간적만행으로 국제법으로건 국내법으로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고 그것을 지시한 자는 전범으로서 재판을 받지 않으면 안되게 되어 있다. 설령 무장대를 체포하였더라도 재판없이 처형하는 것은 명백히 불법행위였다. 그런데 제주도에서 희생된 3만여명의 대다수는 누가 보아도 양민이었고 그들 다수는 집단학살을 당하였다.
이승만의 책임이나 현지 한국인 지휘관의 책임도 준엄하게 추궁하여야 하지만 미국의 책임은 특히 중시하지 않을 수 없다. 4.3은 미군정의 실정으로 인하여 미 군정하에서 일어난 일이었고 한국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도 미국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