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라리 방화 사건에 대한 고찰(제주 4.3 사건)
- 최초 등록일
- 2020.06.06
- 최종 저작일
- 2019.11
- 11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2,000원
소개글
제주 4.3사건에 대한 글입니다. 그 중에서도 오라리 방화사건을 다루고 있는데, 당시 언론 보도 내용과 사실 간의 비교를 통해 사건을 고찰합니다.
목차
1. 서론
가. 주제 선정 이유
나. 제주 4.3 사건
다. 오라리 방화사건
2. 오라리 방화사건
가. 발단
나. 전개
다. 결과
3. 주범 논란과 사건 해석
가. 당시 언론 보도
1) 당시 신문 기사 전문
나. 방화사건 주범 논란
다. 현대의 해석과 평가
4. 결론 및 제언
가. 결론
나. 제언
5. 참고 문헌
본문내용
가. 주제 선정 이유
오랜 시간동안 제주 4.3 사건은 좌익에 의한 ‘폭동’이라는 해석이 학계와 대한민국 정부의 주된 의견이었다. 2003년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가 제작되면서 대대적인 진상규명이 진행되었다고는 하지만 4.3 사건은 아직까지 명확한 역사적 성격이 마련되지 않은 채 낮은 인지도와 크고 작은 오해로 얼룩져있다. 따라서 본 레포트는 제주 4.3 사건, 그 중에서도 오라리 방화 사건의 주동자 논란에 대한 고찰을 통해 4.3 사건의 진상을 보다 더 명확하게 이해하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한다.
나. 제주 4.3 사건
제주4·3사건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일제가 패망한 이후, 남한과 북한의 이념갈등이 크게 대두되었다. 이것이 발단이 되어 제주도에서 남로당의 무장대가 봉기했고, 무장대와 미군정과 국군, 경찰 간의 충돌이 일어났다. 이러한 충돌 및 이승만 대통령 정권 이후, 미국 정부의 묵인 하에 이루어진 초토화 작전과 무장대의 학살로 많은 제주도민들이 억울하게 희생당하는 일이 발생한다.
민간인 피해자만 14000여명으로 한국 현대사에서 6.25전쟁 다음으로 인명피해가 심했지만 사건에 대한 진상은 한동안 음지 속에 숨어 세간에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4.3사건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면서 진상규명 및 희생자 추모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2000년에는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다. 오라리 방화사건
오라리 방화사건은 제주 4.3 사건 초기에 제주읍 오라리의 전략촌에서 벌어진 방화 사건이다. 사건 이후 그 전부터 진행되고 있었던 무장대와 경비대 간의 평화 협상이 결렬되었다.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에 따르면 협상이 결렬된 주요인이 바로 이 오라리 사건이며..
<중 략>
참고 자료
김용철, 「제주4ㆍ3 사건초기 경비대와 무장대 협상 연구 - 소위 4ㆍ28 평화협상에 대한 반론」, 『4.3과 역사』 (제 9호, 10호), 2010
김종민, 「제주4.3항쟁- 대규모 민중학살의 진상」, 『역사비평』 (통권 42호), 1998
이관열, 「제주4.3사건 보도의 언론사적 의미」, 『강원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 (사회과학연구 42집), 2003
전예원, 「4.3은 말한다 2」, 『제민일보-4.3취재반』, 1994
제주사삼사건 진상조사보고서작성기획단,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