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태조 이성계의 3대 정책에 배경
- 최초 등록일
- 2005.07.06
- 최종 저작일
- 20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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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서론
2. 농본정책
3. 숭유억불정책
4. 사대교린정책
5. 결론
본문내용
조선은 고려 후기에 국가의 재정이 파탄되고 민생이 피폐하였던 경험을 살려 초기부터 국가를 부강시키고 민생을 안정시키는 방향으로 경제구조를 대폭 개편하였다. 국초부터 농본민생주의(農本民生主義)를 내세워 농업발달을 위한 여러 가지 제도와 함께 양반관료의 경제적 기반인 토지정책에 유의하였다. 농업을 주요한 경제기반으로 하는 조선은 국가적으로 농업을 장려하였다. 먼저 농업생산력을 높이기 위하여 토지개간, 수리시설 확충, 종자개량, 농사기술 혁신 등에 주력하였다. 북방개척과 해안지방의 개간, 그리고 내륙의 황무지를 적극 개간하여 건국 초기에 100만 결에 지나지 않던 농토가 세종 때는 160만 결로 늘었다. 그리고 농사에 필요한 저수지가 수천 개소로 늘어났다. 또, 바람과 가뭄에 강하고 일찍 수확되는 벼 품종들이 새로 개발되기도 하였다. 영농기술도 크게 발달하여 모내기법이 남부지방에서 실시되고 보리와 벼의 2모작이 일부 지역에서 이루어졌다. 시비법(施肥法)의 발달로 휴경지(休耕地)가 없어졌으며, 면화재배가 확대되고, 각종 원예작물 및 과수의 재배가 널리 보급되었다. 이러한 농업의 비약적 발전으로 단위면적당 수확량도 크게 늘어났다. 그러나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에 걸쳐 왜란과 호란의 대전란을 겪으면서 농촌은 황폐화되었다. 이에 조정과 농민의 거국적 노력으로 18세기 초에는 차차 복구되었다. 왜란 직후 양안(量案)에 등록된 토지 면적이 54만 결이었으나, 18세기 초에는 약 140만 결로 늘어났다. 경지면적의 확장과 동시에 수리시설도 크게 개선되었다. 제언사(堤堰司)가 설치되었고, 제언절목(堤堰節目)이 공포되어 수천 개소의 저수지 ·보가 수리 또는 신축되었다. 대규모 저수지로는 수원의 서호(西湖), 김제의 벽골제(碧骨堤), 홍주의 합덕제(合德堤), 연안의 남대지(南大池) 등이 있다. 수리시설의 확장으로 수전(水田)농업을 발전시켜 밭농사를 논농사로 바꾸어 갔고, 이앙법(移秧法)과 견종법이 널리 보급됨에 따라 1인당 경지면적이 크게 늘어나 광작(廣作)이 나타났다.
참고 자료
※참고도서
-「(교양)한국사의 이해」, 한국교재연구회 편, 삼경사
-「한국사통론」, 변태섭, 삼영사
-「한국사신론」, 이기백, 일조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