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차인]우리나라 차(茶)인 효당 최범술
- 최초 등록일
- 2006.06.27
- 최종 저작일
- 20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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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초의선사 이후의 차인에 대해서 조사했어요^^
목차
파란 많은 생애
차생활의 시원지가 된 다솔사
본문내용
멀리 신라시대부터 마시기 시작한 차가 고려에 와서는 불교의 융성과 더불어 왕실이나 사찰에서 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에게까지 널리 유포되었으나 웬일인지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쇠잔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러다가 조선조 말인 19C에 들어와서 해남땅에서부터 우연찮게 차역사의 맥을 잇게 되었음은 다성(茶聖)으로 일컬어지는 초의선사의 『다신전』과 『동다송』에 기인한다. 때마침 강진으로 유배되어 온 다산(茶山)이 혜장과 초의를 만나면서 차는 사찰에서의 공다(供茶)와 수선(修禪)의 방편 이상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고, 마침내 추사(秋史)와의 인연으로 그 범위를 넓혀 가는 듯 하였다. 그러나 초의선사 이후 우리 차문화는 또 한 번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러다가 나라가 망하고 국권이 회복되는 해방의 날을 맞고 6.25전쟁이 지난 지도 10여년이 세월이 지난 1960년대에 들어와서 사천(泗川)의 한 사찰인 다솔사에서 음다의 불씨는 다시 지펴지기 시작하였다.
파란 많은 생애
효당(曉堂)은 1904년 전남 사천 다솔사 부근에서 태어났다. 국운이 풍전등화와 같은 급박한 시대였던 1916년 사천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에 집 부근의 다솔사에 입산하여 환경선사에게 계를 받았다. 3 ․ 1 운동 때는 독립선언서를 등사하여 배포하다 일경에게 붙잡혀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그의 천재성이 승가에 알려져 1922년 일본 유학의 길에 올라 다이쇼 대학 불교학과에 입학 했다. 33년 졸업할 때까지 환경선사의 도움도 받고 고학도 하면서 어려운 학창 시절을 보냈다. 고구마 장사, 인력거꾼, 신문팔이 심지어 똥 푸는 일까지 하며 돈을 벌었고 남은 돈으로는 조카들까지 공부를 시켰다고 한다.
한번은 뚱뚱한 일본 여자를 인력거에 태워 비탈길을 올랐는데 너무나 힘이 들어 ‘그 년 몹시도 뚱뚱하네’ 했더니 알아 듣고는 인력거 문을 살짝 열고 ‘뚱뚱해서 죄송합니다’라고 우리 말로 대답을 해서 당황했다는 일화도 전한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