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의 입지 및 공간구조
- 최초 등록일
- 2019.11.14
- 최종 저작일
- 2019.11
- 26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5,000원
소개글
"경복궁의 입지 및 공간구조"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경복궁의 창건과 변천과정
2. 경복궁의 입지
3. 경복궁의 공간 구조
4. 경복궁의 경관
참고문헌
본문내용
경복궁(景福宮)은 조선의 법궁(法宮)으로 세워진 궁궐이다. 경복궁 창건은 조선 건국 초기 한양 천도(遷都)의 역사적인 배경 속에서 이루어졌다. 혼란하던 고려 말, 백성과 신하들의 지지를 받은 고려 무장 이성계(李成桂, 1335~1408: 태조(太祖))는 1392년 7월에 개경(開京)에서 왕으로 즉위하여 조선 왕조를 개창하였다. 건국 초기의 5개월 동안 다섯 번이나 반란이 일어날 정도로 왕권이 불안한 상태에서 태조는 천도를 서둘러 추진하고자 했다. 그러나 신하들의 반대로 천도는 바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천도 후보지로는 한양(漢陽), 계룡산(鷄龍山) 기슭, 한양의 무악(鞍山)이 차례로 거론되었지만, 모두 신하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태조와 천도 자체를 무산시킨 신하들과의 논쟁 끝에 “우리나라 안에서는 송악의 땅이 최고이고, 남경(南京:한양)이 그 다음입니다.” 라는 서운관(書雲觀) 관원의 대답과 “반드시 도읍을 옮기고자 하시면 이곳이 좋습니다.” 라는 대다수의 신하의 의견으로 한양 천도가 결정되었다.
태조는 1394년(태조3) 8월에 한양을 새로운 도읍지로 확정하였고, 한양에 궁궐 건설을 위한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태조는 새 수도 한양의 도시계획을 천도를 반대하던 정도전(鄭道傳, 1342~1398)에게 맡겼다. 10월에 태조는 개경을 떠나 아직 궁궐과 종묘(宗廟)의 건축 공사가 시작되지 않은 한양으로 천도를 하였다. 태조는 먼저 종묘와 사직단(社稷壇)을 건축하였고, 12월에 궁궐 공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궁궐 공사에 동원한 인력은 각 지방에서 온 총 1만 5천명이었으며 공사를 급진전시켜 10개월만인 이듬해 1395년(태조4) 9월에 준공하였다. 태조는 한양부(漢陽府)를 한성부(漢城府)로 개칭해 부르도록 공표하였다. 이로써 한성은 조선의 공식적인 수도가 되었다.
1395년(태조4) 10월에 <태평성대를 누리는 큰 복을 빈다> 는 뜻으로 궁궐 이름을 경복궁(景福宮)이라 정하였다.
참고 자료
경복궁 중건 이후 전각구성의 변화 : 「경복궁배치도」와 「북궐도형」을 중심으로 / 이혜원
창건 경복궁의 耳房형 건물과 行廊의 평면구성에 관한 연구 / 정유진
高宗의 景福宮 운영과 공간 인식 / 안희경
한국과 베트남의 궁궐 비교 연구 : 조선왕조 경복궁과 응우옌 왕조 다이노이를 중심으로 / 판티아이응이에
네이버 지식백과 (https://terms.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