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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광개토왕비 국가별 연구사 정리"에 대한 내용입니다.목차
1. 머리말2. 광개토왕비 개관과 특징
3. 중국의 광개토왕비 연구
4. 일본의 광개토왕비 연구
5. 한국의 광개토왕비 연구
1) 북한에서의 광개토왕비 연구
2) 남한에서의 광개토왕비 연구
6. 맺음말
본문내용
광개토왕비(廣開土王碑)는 광개토왕의 공적을 칭송하기 위한 목적으로 건립하였으며 현존하는 고구려 비석 중에서 가장 크고, 많은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평가한다. 게다가 이 비석은 고구려 5세기의 상황을 알려주는 1차 사료로서 그 가치가 매우 크다. 그러나 광개토왕비는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로 오래 방치되었고, 세월이 지남에 따라 풍파 및 훼손으로 비문 자체를 판독하는 것부터가 어려운 지경이 되었다. 심지어 일본 군부에서는 고대사 연구의 이름을 빌려 근대 일본의 해외침략을 위한 이데올로기적 정당성을 반영하기 위해서 광개토왕비 일본운반계획을 세웠었다. 그러나 너무 크기 때문에 운반하기 곤란하며 글자면 손상의 우려가 있었으므로 중지되었다. 이렇게 비 자체가 훼손이 심각하게 진행되었음에도 광개토왕비에 관한 연구는 꾸준하게 진행해서 연구된 역사가 1세기가 넘었다. 지금도 한국, 중국, 일본 세 국가의 광개토왕비 연구는 각자의 관점에 따라 활발하게 진행 중이다.고구려의 5세기를 파악할 수 있는 1차 사료라는 중요한 가치를 가진 금석문인 광개토왕비는 청나라에서 먼저 주목하기 시작하였다. 1881년 청나라 탁공(拓工)이 처음 탁본을 만든 이후로 다수의 탁본이 제작되었고, 이러한 탁본을 기초로 연구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근대 학문이란 맥락에서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된 것은 일제 참모본부 군사정보부원인 酒匂景信(사코우 가게노부)가 일본으로 탁본을 전송하면서 연구가 시작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광복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연구를 시작하였고, 북한도 역시 1960년대 이후로 광개토왕비를 연구하였다.
이러한 광개토왕비를 부르는 데에는 여러 가지 명칭이 있다. 광개토왕비, 광개토호태왕비, 호태왕비 등등으로 불린다. 우리나라에서는 광개토왕비라는 용어를 쓴다. 이 용어는 우리나라에서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훈적비를 줄여 부른 말이다. 북한의 경우에는 광개토호태왕비라는 용어를 쓴다. 이 용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한국, 중국, 일본에서 사용하는 광개토왕과 호태왕의 통일된 이름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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