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진 봉평신라비
- 최초 등록일
- 2021.02.21
- 최종 저작일
- 20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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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울진 봉평신라비"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들어가며
2.울진 봉평신라비의 발견
3.울진 봉평신라비의 해석
4.울진 봉평신라비의 의의
5.결론
6.나오며
본문내용
한국고대사를 연구하면서 부딪치는 가장 큰 어려움은 관련 사료가 지극히 빈약하고 그나마도 신빙성이 논란된다는 데에 있다. 그런 점에서 금석문은 그 시대의 유물이며 그때 쓰여진 것이므로 신빙도가 대단히 높다는 점에서 후대에 정리된 사서들에 비해 차지하는 비중이나 의미가 사뭇 다르다. 때로는 풀리지 않을 것 같던 어려운 문제들을 단숨에 말끔히 해결하기도 하며 한국고대사의 새로운 이해 방향에 커다란 문제를 던질 만한 내용이 담겨진 경우도 가끔 있다. 이런점들은 여타 분야와 비교하여 한국고대사에서 금석문이 차지하는 비중이 어떠한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들로 손꼽한다.
금석문은 이렇게 귀중한 자료로 활용되기도 하지만 금석문에서 부분적으로 필요한 기사만을 따로 떼어 역사 복원에 이용할 경우 전체를 간파하지 못하고 오류를 범하는 경우도 생긴다. 이러한 점에 유의해야하며 금석문을 차근차근 분석함으로써 전반적인 이해를 높힐수 있을 것이다.
고대국가 중 가장 관심이 가는 나라는 통일을 한 신라였다. 한반도 끝에 위치하는 지리적 요건 때문에 선진문화의 수용이 늦었고 발전도 늦었다. 또한 토착세력이 강했기 때문에 오히려 중앙집권체제로 통합되기 어려웠다. 하지만 6세기에 들어선 신라는 영토를 확장하기 시작했고 불교문화를 바탕으로 중앙집권체제로 돌입하게 된다.
신라사회는 6세기에 들어와 급격히 그 전과는 다른 새로운 모습으로 변모하기 시작하였다. 지증왕 대로부터 시작된 이러한 변화는 그 다음의 법흥왕 대에도 이어져 병부를 설치하고 율령의 반포,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였다. 또한 불교를 공인하고 상대등 벼슬을 새로 두어 국사를 총리하게 하였으며 연호를 사용하는 등 일련의 제도적 정비과정을 거치면서 점차 정리되어 갔다. 532년 본가야를 병합하여 낙동강 유역을 확보하는 등 영토 확장에도 힘을 쏟았다.
이와 같은 지증왕, 법흥왕대의 체제정비가 그 자체 신라사회의 내재적 발전에서 말미암은 것임을 두말할 필요도 없지만, 이후 신라는 이를 발판삼아 급성장함으로써 마침내 중앙집권체제를 이룬다.<삼국유사>가 법흥왕대를 새로운 시대로서 이른바 중고(中古)의 시작으로 잡고 있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하겠다.
참고 자료
<금석문과 신라사> 주보돈 지식산업사 2002
<천년의 왕국 신라> 김기흥 창작과비평사 2000
<HD역사스페셜2-적자생존 고대국가 진화의 비밀> 표정훈 효형 2006
<역사스페셜 124회 신라는 어떻게 강대국이 되었나-울진 봉평비의 비밀>
<불교고고학> {고고자료에 나타난 불교공인 이전의 신라의 지방통치-영일 냉수리비와 울진 봉평비를 중심으로} 박희택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