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조선 초기 대외관계 _ 대명 관계를 중심으로"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장. 서론
2장. 고명책인 문제
3장. 종계변무 문제
4장. 결론
본문내용
1. 서론
고려 우왕 시기 명나라의 철령위 설치에 반발하여 최영을 중심으로 요동 정벌이 주장된다. 이성계는 이에 반대하며 4불가론을 제시한다.
太祖曰, “今者出師, 有四不可. 以小逆大, 一不可. 夏月發兵, 二不可. 擧國遠征, 倭乘其虛, 三不可. 時方暑雨, 弓弩膠解, 大軍疾疫, 四不可.”
하지만 최영 등에 의해 조정에서는 수용되지 않았고, 결국 조민수와 함께 출병하게 된다. 이에 이성계는 압록강을 완전히 도하 하기 전에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최영을 제거하고, 우왕을 유배시키며 정권을 장악한다. 이후 자신이 옹립한 창왕마저 폐가입진(廢假立眞)을 명분으로 폐위시키고 우왕과 함께 처형한다. 이후 공양왕 4년(1392) 도평의사사 인준을 통해 새 왕조를 개창하니 그것이 조선이다.
이성계의 4불가론 중 첫 번째를 보면, 작은 것으로 큰 것을 거스르는 상황이니 안된다고 주장한다. 이는 이성계의 명나라에 대한 사대적 태도를 볼 수 있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정권을 장악하기 위한 형식적이고 표면적인 태도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성계는 이소사대의 명분 아래 정권을 장악했다는 점, 역성혁명에 의한 조선왕조 수립에 정통성을 확인받을 수 있다는 점, 더욱이 왕권의 안정을 도모할 수 있다는 점에서 명나라에 대한 사대적인 태도를 지속해서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조선 초기 대명 관계는 쉽게 가까워지지 않았다. 고명책인 문제, 생흔·모만 문제, 표전 문제, 종계변무 문제 등이 발생한 것이다. 명나라는 어떠한 이유에서 조선의 사대적인 자세에도 불구하고 긴장 관계를 해소하지 않은 것이며, 이에 조선은 어떻게 대처하였는지 각각의 문제를 고찰함으로써 살펴보려고 한다.
2. 고명책인 문제
고명은 명·청 시기 국내 관원 임명 및 외국 국왕의 책봉에 사용된 문서로 쉽게 말하면, 일종의 임명장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 함께 하사되는 인신(인장)은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도)의 도장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고명과 인신은 중국 왕조에서 주변국에게 책봉을 인정하며 하사하는 의례적인 물품인 것이다.
참고 자료
<高麗史>
<太祖實錄>
<太宗實錄>
<中宗實錄>
<宣祖實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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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편한국사
우리역사넷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