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와 후백제의 공산전투
- 최초 등록일
- 2020.06.08
- 최종 저작일
- 20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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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려와 후백제의 공산전투』"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들어가며
2. 초기 고려와 후백제의 관계
3. 공산전투의 발발 배경
4. 공산전투의 결과
5. 왕건의 목숨을 구한 신하
6. 공산전투의 흔적
7. 나가며
본문내용
1. 들어가며
왕건이 고려를 세우고 난 초기에 후백제와 고려는 서로 우호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두 나라 사이의 우호적인 관계는 흔들리기 시작하였고 결국 전쟁이 발생하였다. 초기 고려는 남진정책을 통하여 신라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영향력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고려의 남진정책은 신라를 압박하던 후백제와 필연적으로 대립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본 발제에서는 신라에 대한 이권을 놓고 두 나라가 벌인 공산전투에 대하여 알아볼 것이다. 또한 그 결과에 따라 두 나라가 상호간에 어떠한 영향을 받게 되었는지 살펴보고 나아가서 공산전투가 오늘날 우리나라의 지명에 어떤 연관이 있는지 알아보겠다.
2. 초기 고려와 후백제의 관계
공산전투 이전까지 고려와 후백제의 관계에 대하여 알아보기 위해 왕건이 고려를 개창한 918년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후백제는 왕건이 즉위하고 나서 고려에 대한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은 채 고려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당시 고려의 상황은 궁예의 무리들이 지속적으로 반란을 일으키던 상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고려는 가급적이면 외국과 갈등을 일으키지 않으려고 하였다. 외국과의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고려는 신라와 후백제에 사신을 보내는 한편 고려 내부의 호족들을 포섭하기 위해 그들을 회유하는 정책을 펼쳤다.
후백제는 고려의 사정을 지켜보면서 동쪽으로 세력을 확장하기 위한 기틀을 다져나가며 고려가 차지하고 있던 웅주(熊州)와 운주(運州)등을 다시 획득하였다. 웅주와 운주가 후백제에게 복속되자 고려는 후백제가 북쪽으로 치고 올라올 것을 대비하기 위해 후백제와 맞닿아 있는 지역의 방비(防備)를 튼튼히 하였다.
그 후 925년에 고려 내부의 상황이 안정되면서 왕건은 후삼국시대의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 유금필(庾黔弼)을 보내 후백제의 연산진(燕山鎭)을 공격하면서 전쟁양상으로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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