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태조의 후삼국 통일과 훈요 10조
- 최초 등록일
- 2019.07.21
- 최종 저작일
- 20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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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후백제와 고려의 전투
1) 조물성 전투(태조 7년)
2) 공산 전투(태조 10년)
3) 고창성 전투(태조 12년)
4) 운주 전투(태조 17년)
5) 일리천 전투(태조 19년)
2. 후삼국 통일의 역사적 의의, (신라의 삼국통일과 비교)
3. 훈요 10조의 내용과 해설
1) 고려왕의 국호와 서경(평양) 중시
2) 발해 유민 포용과 우대
3) 거란에 대한 정책
4) 불교사상
5) 풍수지리사상
6) 유교사상
본문내용
1. 후백제와 고려의 전투
1) 조물성 전투(태조 7년)
조물성은 경상북도 안동, 구미의 금오산성, 금릉의 조마면, 의성 등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그 위치는 정확하지 않다.
고려는 왕건세력의 충청도 인근의 요충지인 웅주를 잃고 주춤한다. 왕건이 궁예를 폐하고 그 자리를 대신하며 웅주를 쉽게 잃었기 때문에 고려의 혼란을 눈치 챈 후백제가 재빨리 동진을 한다. 따라서 920년 태조 3년에 후백제가 신라를 침공한다. 이에 신라는 왕건이 재위한 후 그와는 호의적으로 지낸다.
924년(태조 7년) 견훤은 아들 수미강과 양검에게 신라의 조물성을 공격하게 한다. 신라가 구원을 청하자, 고려도 장군 애선과 왕충을 보낸다. 양측은 치열한 공방 끝에 고려 측 장수 애선의 군대가 전몰하였으나, 끝내 고려의 승리로 일단 막을 내린다. 이것이 1차 조물성 전투이다.
고려와 신라의 연합과 이에 격분한 견훤은 925년(태조 8년) 10월 재차 3,000명의 기병을 친히 인솔하고 조물성을 들이치니 이것이 2차 조물성 전투이다. 당시 왕건도 사태의 중함을 알고 유금필을 대동하여 친히 남하, 조물성 방어에 나섰다.
이 전투에 대해 『고려사』는 왕건 측의 서간으로 화해를 이루어 왕건 측 왕신과 견훤 측 진호(견호로 추정)의 인질 교환이 이뤄졌다고 기록한다.
2차 조물성 전투 당시 중앙군 간의 격돌에서 왕건이 견훤에 밀렸음을 보여준다. 노회한 견훤은 역시 젊은 패기로 맞선 왕건보다 아직 우세했던 것이다. 더욱이 이 무렵 조물성 인근에 큰 돌림병이 있었는데 견훤 측에만 그 약재가 있어 고려군의 피해도 막심했다고 한다. (『고려사』). 이 때가 바로 견훤의 전성기에 서막이 열렸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2) 공산 전투(태조 10년)
926년 9월에 견훤이 고려의 근품성을 공격하며 전쟁이 시작됐다. 신라가 고려를 지지하는 것에 대해 견훤은 늘 신라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927년 8월, 견훤이 신라를 정벌하기 위해 신라 근암성과 고울부를 공격하고 수도로 진군한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