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성(公山城)과 부소산성(扶蘇山城)을 중심으로 본 백제의 사회와 문화』
- 최초 등록일
- 2020.04.23
- 최종 저작일
- 2016.05
- 9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4,000원
소개글
"『공산성(公山城)과 부소산성(扶蘇山城)을 중심으로 본 백제의 사회와 문화』"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들어가며
2. 공산성(公山城)을 통해 본 웅진백제
1) 웅진(熊津) 백제의 개막
2) 웅진시기의 도성, 공산성(公山城)
3) 공산성(公山城)의 출토 유물로 본 웅진백제의 사회와 문화
3. 부소산성(扶蘇山城)을 통해 본 사비(泗沘)백제
1) 사비시대의 백제
2) 사비시기의 왕성(王城), 부소산성(扶蘇山城)
3) 부소산성(扶蘇山城)의 출토유물을 통해 본 사비백제의 사회와 문화
4. 나가며
본문내용
1.들어가며
백제(百濟)는 기원전 18년 지금의 서울지역의 한강 하류에서 건국되었다. 이후 고구려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의 침략으로 백제의 국력이 쇠약해지자 제 22대 국왕인 문주왕(文周王)이 수도를 웅진(雄鎭)지역으로 천도하였다. 그 후 백제는 제 26대 국왕인 성왕(聖王)대에 이르러 다시 사비(泗沘), 즉 지금의 부여지역으로 수도를 천도하면서 정치, 군사, 외교, 문화 부분의 큰 성장을 이룩하였다. 이렇듯 백제는 건국 이후 475년부터 멸망인 660년까지 185년 동안의 기간을 웅진과 사비에서 보냈으며, 백제 후기의 사회와 문화를 이룩하였다.
따라서 본 발제문에서는 백제 후기의 사회와 문화를 웅진시기의 도성인 공산성과 사비시기의 도성인 부소산성을 중심으로 알아볼 것이다.
2. 공산성(公山城)을 통해 본 웅진백제
1) 웅진(熊津) 백제의 개막
427년 고구려의 장수왕(長壽王)은 집안(集安)지역에서 평양 동북방의 대성산(大成山)지역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적극적인 남진정책을 진행하였다. 백제는 장수왕의 남진정책에 큰 위협을 느껴 백제 제 11대 국왕인 비류왕(毘流王) 7년 신라와 동맹을 맺었다. 그 후 비류왕의 뒤를 이어 개로왕(蓋鹵王)이 즉위했고, 그는 왜(倭)국과 송(宋)나라를 상대로 외교관계를 강화하였으며 왕권의 전제화를 시도하였으나 이는 일반 귀족세력들의 불만을 초래하였다. 또한 개로왕은 풍납토성(風納土城) 동쪽에서 숭산(崇山) 북쪽까지 토성을 쌓고 그 안에 화려한 궁실과 누각(樓閣)을 짓고, 부왕인 비류왕의 무덤을 개수하는 등 사치와 향락을 일삼아 국력을 더욱더 약화시켰다. 이후 고구려의 군사적 압박이 가속화되자 개로왕은 북위(北魏)에 신하들을 보내어 군사적인 요청을 했으나 고구려와 친선관계였던 북위는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러한 개로왕의 전략은 고구려의 침략을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참고 자료
『三國史記』
국립문화재연구소,『學術硏究叢書 第 34輯 - 扶蘇山城』,국립문화재연구소, 2003.
이기동,『백제의 역사』,주류성, 2006.
이현숙,「공주 공산성의 백제 역사문화환경」,『한국대학박물관협회 학술대회 10』, 한국 대학박물관협회, 2012.
이형구,『백제의 도성(都城)』,주류성, 2004.
서정석,「웅진왕도와 사비도성」,『한국사시민강좌 44』,일조각,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