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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명기의 광해군을 읽고 쓴 서평입니다.
목차
Ⅰ. 들어가며
Ⅱ. 왕위에 오르기까지
Ⅲ. 왕위에 오른 광해군
1. 전란 후의 민생안정 정책
2. 왕권 강화대책과 부작용
3. 실리적인 외교정책
Ⅳ. 인조반정과 그 후
Ⅴ. 광해군에 대한 평가
Ⅵ. 참고문헌
본문내용
Ⅰ. 들어가며
1599년, 7년간 전 국토를 헤집으며 전란이라는 이빨로 많은 상처를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명이 쇠퇴하고 후금은 강성해지고 있는 급격한 세력변화가 일어났고, 내부적으로는 당장 공명첩의 남발로 인한 재정문제, 정통성의 부재로 인한 왕권약화, 전란이 남긴 무수한 상처들을 복구해야 하는 막대한 책임이 다음 세대 왕에게 지어져 있었다. 선조의 다음 왕인 광해군은 이러한 문제를 지어야 했고, 부왕의 견제로 정신병을 안고 있던 광해군은 계축옥사를 일으켰고, 그 결과 반정의 명분이 되어 1623년 서인 세력이 주도한 인조반정에 의하여 왕위에 쫓겨나 제주도로 유배를 가게 되었고 1698년 그는 결국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하게 된다.
이러한 광해군에 대해 한명기는 그는 결국 실패했고 비극적 최후를 맞았지만, 그 과정에서 나타난 그의 삶은 극적인 것으로, 역사 격동의 시대를 사는 오늘날의 우리가 한 번쯤은 반추해 볼 만한 역사적 교훈들을 무수히 지니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사실 광해군에 대해 정확히 몰랐던 나로서는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이 책을 통해 저자가 광해군 대의 사건들과 현 한반도 정세를 연결지어서 말하고 있는 메시지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어 이 글을 쓰게 되었다.
Ⅱ. 왕위에 오르기까지
광해군은 공빈 김 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세자로 책봉되기까지에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그는 어려서 병으로 어머니를 여의어 내성적인 성격을 지녔지만, 총명하고 학문에 정진하며 왕으로서의 자질을 키우는 데 소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에게는 배다른 형제가 12명이나 있었고, 위로는 임해군이 있었기 때문에 왕위에 오르는 것은 치열한 견제와 암투를 딛고 일어서야만 했는데 다행히 임진왜란으로 인해 그러한 행운의 기회를 잡게 된다. 선조가 북쪽으로 쫓겨가는 몸이고 또한 조정을 분리하여 비상사태에 대비해야만 했기 때문에 후사를 결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왕세자로 책봉된 광해군은 전란 중에 분조를 이끌면서 왕세자로서 민심을 수습하고, 일본에 항거하기 위해 군사를 모으는 등 최선을 다해 임무를 수행한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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