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선비와 일본 사무라이
- 최초 등록일
- 2012.10.15
- 최종 저작일
- 20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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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선비와 일본 사무라이>를 읽고 선비와 사무라이를 비교분석한 글입니다.
목차
서론
본론
결론
본문내용
‘국화와 칼’에서 날카롭게 분석했듯 일본인의 사고방식 속에서 ‘주(忠)’이라는 관념은 ‘기리(義理)’에 속한 것이며 기리는 가장 구속력이 강한 것이다. 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갚을 수 없는 은혜이며 그렇기에 천황과 주군에 대한 충성, 부모와 친족에 대한 효, 자신이 맡은 임무가 이에 속한다.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기대되는 것이기에 기리는 수동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으며 그러기에 ‘기리보다 쓰라린 것은 없다’는 일본 속담은 본질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주군에 대한 ‘주’를 다하기 위해 기라 요시나가를 제거하지만 쇼군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다. 쇼군은 그들을 용서하여 명예로운 죽음을 하사했으며 명에 따라 전원이 할복한다.
‘위태함을 보면 목숨을 내던져라(見危授命)’는 말은 선비와 사무라이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지만 오랜 전란을 겪은 사무라이들은 이 말을 실천할 기회가 선비들보다 더 많았을 것이다. 인생의 덧없음과 무상함에 대한 자각을 사무라이들은 체험으로서 터득했다. 그의 주군이었던 오다 노부다가도 곧잘 노래하곤 했다고 하지만 ‘몸이여, 이슬로 와서 이슬로 가나니 오사카의 영화여, 꿈속의 꿈이로다.’라며 부채춤을 춘 후 죽음을 맞이한 히데요시의 노래는 그래서 사무라이들에게 더 깊은 인상을 남겼을 것이다. 조선 선비들의 상징이 매란국죽이며 그것이 위험에 처해서도 꿋꿋이 살아남는 것과는 대비되게, 일본 사무라이들의 상징인 벚꽃이 봄날의 좋은 때에 한껏 피었다가 비바람에 떨어지더라도 유감없는 것처럼 사무라이들은 죽음의 미학을 숭고하게 여겼으며 그런 이유로 전장에서 아름답게 죽는 것을 ‘옥쇄(玉碎)’라는 고아한 단어로 일컬었다고 한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