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 최초 등록일
- 2010.11.19
- 최종 저작일
- 20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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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병자호란에 대해 기술하였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참고-요약
목차
3. 병자호란
1) 재침 전의 조・만관계
2) 청의 침입과 조선의 대응
3) 남한산성 수어와 화전양론
4) 의병의 봉기
5) 강화 실함과 남한 산성
6) 전후처리와 조・청관계
본문내용
3. 병자호란
1) 재침 전의 조・만관계
(1) 정묘화약에 대한 양국의 시각
丁卯和約에서 후금과 조선은 형제지간으로 서로 침입하지 않고 평화를 유지하기로 약속하였으나 양측 다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50여 일간의 후금의 침입으로 청천강 이북의 땅은 거의 황폐화 되었고, 아무런 이유없이 침략당한 것에 조선은 분개하였으며, 崇明排金思想이 강한 조선으로서는 후금의 군사적 위협에 의해 맺은 형제의 관계에 상당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해마다 많은 액수의 歲幣와 수시의 요구에 응하기에는 당시 피폐한 조선의 경제력으로는 무거운 부담이었다. 또 후금의 침입목적의 하나가 東江鎭을 토벌하여 모문룡의 세력을 없에는 데 있었지만 모문룡은 난중에도 무사하였고, 도리어 평안도 북쪽을 공격하여 여자와 재물을 약탈하는 등 그 폐단이 많았으며, 조선정부를 위협하여 식량・물자를 요구하므로 조선은 토지에 부가세를 가하여 이것을 동강진 모진영에 보내주는 일이 생겨 경제적으로 더욱 곤란을 당하게 되었다.
후금측에서는 정묘호란 종결 이후에도 모문령 세력은 동강진을 근거로 은밀히 조선과 협력하며 후금의 배후에서 계속 도발행위를 하였고, 장차 후금이 명나라와 총력전을 벌이게 될 때 모문룡의 군사가 큰 장애요인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정묘화약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조선은 정묘화약이 후금의 강요에 의해 맺게 된 것이니 만큼 명나라와의 동맹관계를 강화시켜 후금을 견제하는 기도를 포기하지 않았고, 사신 및 국서의 왕래 등 후금과의 외교적인 접촉이 있을 때마다 문자나 언어를 통하여 은연중에 후금을 모독하는가 하면, 후금의 세폐 증액요구를 거부하고 도리어 감액을 요구하며 반항적인 태도를 취하여 후금의 의구심을 자아내어 후금은 조선을 완전히 굴복시켜 그들의 영향력 아래에 두기 위한 화약의 개정을 모색하게 되었다.
이하생략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