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황제의 정책
- 최초 등록일
- 2010.08.29
- 최종 저작일
- 20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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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종황제 역사청문회`라는 교수신문에서 발간한 책을 바탕으로 한 요약본으로, 고종황제의 재정정책과 대한제국의 정책에 관한 간략하게 정리된 자료임
목차
1) 김재호 교수의「대한제국 재정 정책은 주먹구구식」요약
2) 이영훈 교수의「고종은 여전히 소중화적 세계관에서 헤엄친다」요약
본문내용
1) 김재호 교수의「대한제국 재정 정책은 주먹구구식」요약
김재호 교수는 이태진 교수를 비롯한 내재적 발전론자들에 대해 “가보지 않은 길을 붙들고 시간을 낭비할 것이 아니라 식민지 시대에 진행된 ‘근대 경제성장’과 그에 따른 사회 변화를 밝히는 것이 현재의 한국 경제에 대한 성찰을 위해 더 유익하다.”는 요지의 주장을 펴고 있으며, 식민지 근대화론자로서 식민지 시대에 개시된 근대 경제성장의 역사를 소거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장기역사에 통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즉, ‘식민지 근대화도 우리 역사의 일부’라는 것이다. 사실 경제 동향을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국민소득의 추계가 가능해진 것이 식민지시대부터였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나타난 통계적 수치와 결과를 중시’하는 경제학자로서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말을 한 것으로 본다.
그는 이태진 교수가 주장했던 1896년부터 시작된 ‘반등세’를 대한제국의 성과로 볼 수 없고, 이는 ‘사실의 부족과 해석의 과잉’이라는 사례로 평하며, 1905년 이후의 식민지화 과정을 통해 대한제국의 황실재정을 정점으로 한 ‘구체제’가 해체되고, 일제시기 토지조사사업으로 대표되는 근대적 재산권 제도가 확립됨으로써 근대 경제성장이 개시될 제도적 환경이 갖춰졌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1896년부터 시작된 반등세를 ‘해석의 과잉’으로 평하며 이것이 대한제국의 성과로 볼 수 없는 이유로 다음의 네 가지를 들고 있다. ①지대량이 18세기 수준을 회복한 때는 토지조사 사업이 끝나고 산미증식 계획이 시작되는 1920년대 이후였다. 그리고 그 원인도 대한제국의 정책, 즉 내장원이나 수륜원의 개간 내지 수리시설 증설이었다는 증거는 찾기 어렵다. ②시장경제의 발달 정도를 보여주는 높은 수준의 시장 통합이 이뤄진 것은 식민지시대 이후였다. 본격적인 시장 통합은 식민지기에 교통․통신 기반이 갖춰지면서 시작됐다. ③높은 수준(年 40%)에서 경직적이었던 이자율이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