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 안 읍 성 민 속 마 을
- 최초 등록일
- 2009.12.03
- 최종 저작일
- 2009.11
- 4페이지/ MS 워드
- 가격 1,500원
소개글
조선시대의 석축읍성을 다녀왔다. 이 성의 둘레는 1,385m라고 한다. 현재 성벽과 동. 서. 남문지(門址), 옹성(甕城) 등의 시설이 남아 있다. 고려시대 후기에 왜구가 자주 침입하므로 1397년(태조 6) 이곳 출신의 절제사(節制使) 김빈길(金彬吉) 장군이 흙으로 읍성을 쌓았다. << 세종실록>>에 의하면서 본래보다 넓혀서 쌓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1450년경에는 석축으로의 개축이 거의 마무리에 이르렀는데, 이때의 둘레는 2,865척이었고, 성벽의 높이는 평지에서 9.5척, 높은 곳은 8.5척이었다고 한다. 이때는 옹성이 없이 문이 세 곳이었고 적대는 12개가 계획되었으나 4개가 만들어졌다. 당시 성 안에는 우물 2개와 연못 2개가 있었으며, 성 밖의 해자(垓字)는 파지 않았다. . .
목차
없음
본문내용
11월 1일 날 남자친구와 함께 자가용으로 약3시간을 운전해 전라남도 승주군 낙안면 남내리, 동내리, 서내리에 걸쳐있는 조선시대의 석축읍성을 다녀왔다. 이 성의 둘레는 1,385m라고 한다. 현재 성벽과 동. 서. 남문지(門址), 옹성(甕城) 등의 시설이 남아 있다. 고려시대 후기에 왜구가 자주 침입하므로 1397년(태조 6) 이곳 출신의 절제사(節制使) 김빈길(金彬吉) 장군이 흙으로 읍성을 쌓았다. << 세종실록>>에 의하면서 본래보다 넓혀서 쌓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1450년경에는 석축으로의 개축이 거의 마무리에 이르렀는데, 이때의 둘레는 2,865척이었고, 성벽의 높이는 평지에서 9.5척, 높은 곳은 8.5척이었다고 한다. 이때는 옹성이 없이 문이 세 곳이었고 적대는 12개가 계획되었으나 4개가 만들어졌다. 당시 성 안에는 우물 2개와 연못 2개가 있었으며, 성 밖의 해자(垓字)는 파지 않았다. 문의 보호시설인 옹성은 그 뒤에 설치되고, 여장도 무너진 다음 다시 수축을 거듭하여 오늘날에 이루었으나, 여장은 모두 붕괴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읍성은 체성(體城)의 축조에 있어서나 적대를 구비한 점에서 조선 초기의 양식을 그대로 보여준다. 성은 낮은 구릉을 포함한 평지에 동서방향으로 기다란 장방형에 가깝다. 문은 동문(樂樓), 남문(雙淸樓이었다가 鎭南樓로 됨), 서문(樂秋門)의 세 곳이 터를 남기었고, 옹성은 남, 서문 터에서만 흔적을 볼 수 있다. 적대는 동문 터의 좌우에 하나씩, 동북, 동남쪽의 모서리에 하나씩 있어서 <<문종실록>>의 기록과 일치하고 있다. 성벽은
옛날 집과 옛날 사람들도 살고 또는 영화 장금이랑 서편제등도 촬영했던 낙안읍성은 한국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어 좀 멀기는 하지만 주변에 한국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장소와 볼거리가 많아서 몇 명 친구들이 같이 여행코스를 잘 잡아 1박2일로 한번 가보면 한국에서 가장 좋은 추억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 5월 낙안민속문화축제 열림. 10월 남도음식축제 열림.
* 주변에 조계산 도립공원, 선암사, 송광사, 동화사, 제석산, 고인돌공원, 주암호, 공용박물관 등의 관광지가 있음.
입장료/입장시간
어 른 청소년(중/고등학생 및 군인) 어린이(초등학생) 비 고 개 인 2,000 원 1,500 원 1,000 원 TEL:061)749-3347
749-3893 단 체 1,500 원 1,500 원 500 원 입장시간 09:00~ 18:00
교통수단
교통수단 시 간 비 용 비 고 시외버스 부산서부-순천 2시간30분 약 11,300 시간 오래 걸리는 원인:
원래 낙안읍은 순천시에 속하지 않았으며 도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