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균의 사상에 대하여
- 최초 등록일
- 2008.01.17
- 최종 저작일
- 20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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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후기 개화파 김옥균의 사상적 특징을 정리한 글입니다. 많은 도움되시길 바랍니다.
목차
I. 서론
II. 본론
1. 개화파의 정치개혁 사상
2. 개화파의 적극적 활동
3. 김옥균의 정치사상
III. 결론
본문내용
I. 서론
김옥균의 충청남도 공주에서 김병태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그이 얼굴이 백옥같이 맑고 아름다워 그의 부친은 이름을 옥균이라 지었다고 한다. 김옥균의 가문은 초대에 높은 벼슬을 지낸 선조들이 있었으나 그 후 실세하여 그의 부친 김병태는 벼슬길에 나서지 못하였다. 김옥균의 모친 송씨 부인은 대단히 선량하고 인정 많은 아름다운 품성의 소유자였다. 김옥균은 벌써 두 살이 잡히면서 말하기 시작하였으며 3-4세 때에는 부모의 말동무가 되어 양친의 극진한 사랑 속에서 자라났다. 김옥균의 나이 3세가 되던 때 그의 부친은 생활 곤란으로 인하여 집을 천안으로 옮긴 후 서당 훈장을 하였다. 김옥균은 유년시절을 한적한 농촌에서 자랐으나 어려서부터 동무를 몹시 즐기는 성질이 있어서 그 집 정원에는 항상 어린 또래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김옥균의 나이 6세 되던 해 그의 부친이 달을 가리키면서 들을 지어 보라고 하니 그는 “워수소조천하” 즉, “달은 비록 작으나 온 천하를 비친다.” 고 시를 지어 온 동네 어른들을 경탄시켰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 해 가을에 옥균은 종숙인 김병기의 양자가 되어 서울로 올라갔다. 김옥균은 6-11세 까지 양부의 집에서 글공부를 하였으며 남달리 뛰어난 총명으로 하여 그의 지력은 날에 날마다 샘물처럼 용솟아나고 있었다.
그러다 1866년에 온 나라에 격동적 영향을 미친 역사적 사건이 벌어졌는데 그것은 미국 해적선 ‘셔먼호’의 침입사건과 불란서 함대의 무력침공사건이었다. 구미 자본주의의 침략을 반대하는 전 민족적 투쟁의 심각한 영향 하에서 김옥균은 조국에 도래한 민족적 위기를 자각하게 되었고 이러한 위기를 당하고도 부패와 타락만이 가증해가고 있는 조국의 현실을 애타게 우려하게 되었다.
이처럼 우리나라의 역사적 전환기에 놓인 환경에서 자란 김옥균의 사상 속에는 조국의 위기를 구원하고 나라의 정치를 바로 잡아야 하겠다는 열렬한 지향이 씩씩하게 자라났으며 이러한 지향은 그로 하여금 당시 강한 생활력을 가지고 흐르고 있던 실학의 진보적 사조를 불타는 정열을 가지고 연구하게 하였다.
참고 자료
홍종도, 「북한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역사비평사, 1990
김문용, 이흥용 역, 「한국철학사상사」, 예문서원,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