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사상의 형성과 영향
- 최초 등록일
- 2019.08.28
- 최종 저작일
- 20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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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개화사상의 형성과 영향"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개화사상의 형성
Ⅲ. 개화파
1) 개화파의 성립
2) 개화파의 분화와 그 요인
3) 개화파의 내용과 성격
Ⅳ. 개화사상의 영향
Ⅴ. 맺음말
참고문헌
본문내용
Ⅰ. 머리말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봉건체제 모순의 심화와 경제적 위기, 제국주의 열강들의 침략으로 반침략과 반봉건이 민족의 역사적 과제로 떠올랐다. 각 변혁세력들은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려면 종래와 같은 전근대적 응전의 방법으로는 불가능하고, 새로운 응전의 방안을 고안해 실행해야 한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었다. 서양 열강의 도전에 대한 응전의 사상으로 19세기 중엽에 한국 민족의 지식인들은 자신의 계급적 조건과 역량을 기반으로 개화사상, 동학사상, 위정척사사상 등을 형성하였다. 그 중에서도 나라 안의 봉건적 모순을 깨닫고 세계 역사발전의 방향으로 사회를 형성하고자 ‘개화사상(開化思想)’이 나타났다. 고종 17년(1880)을 전후한 시기에 세계 각국의 문호개방 요구로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는 등 조선사회는 일대 전환기를 맞이함으로써 세계열강의 접근, 도전에 대처할 적절한 대응책을 마련하고 국가의 명맥을 유지하기 위해 개화운동은 필수불가결한 것이었다.
Ⅱ. 개화사상의 형성
초기 개화사상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은 조선 후기 북학파의 거두였던 박지원(朴趾源)의 손자 박규수(朴珪壽, 1807-1877)와 중인 출신의 오경석(吳慶錫, 1831-1879), 유홍기(劉鴻基:일명 유대치, 1831-1884)였다.
환재(瓛齋) 박규수(朴珪壽)는 조선후기 실학자 박지원의 친손자로서 고위 양반 출신이었으나 그의 조부 박지원의 실학적 학통을 이어받아 일찍이 개화사상을 형성하게 되었다. 특히 영국과 프랑스의 연합군이 베이징을 점령하였던 1860년 이후 두 차례 북경에 가서 체득한 자본주의 열강의 각축장이 된 청의 현실, 그리고 자신이 평안도관찰사 시절인 1866년(고종 3년) 직접 경험한 제너럴셔먼호 사건 등은 그로 하여금 조선의 문호개방을 통한 부국강병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하였다. 그러나 당시는 대원군 집권기여서 자신의 뜻을 실현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당시 박규수의 대일 개항론에서 주목할 만한 특징은 자주적인 개국을 통하여 일본과의 전쟁을 막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조선이 중국의 ‘속방(屬邦)’임을 내세워 일본의 침입을 막으려고 했던 의도도 있었다.
참고 자료
신용하, 『초기 개화사상과 갑신정변연구』, 지식산업사, 2000
신용하, 『한국 개화사상과 개화운동의 지성사』, 지식산업사, 2010
강만길, 『고쳐 쓴 한국근대사』, 창비, 2006
이광린, 『개화파와 개화사상연구』, 일조각, 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