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중일 전쟁 아시아 태평양 전쟁
- 최초 등록일
- 2006.11.22
- 최종 저작일
- 20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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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전쟁을 위한 준비
중일 전쟁
대동아 공영권
아시아 태평양 전쟁
전단속의 전쟁
히로히토 천황의 전쟁 책임
본문내용
전쟁을 위한 준비
1. 5.15사건
만주 사변 이후 일본 국내에서는 육해군의 청년 장교를 중심으로 테러리즘이
유행하였는데1932년 5월 해군 청년 장교들이 수상관저 등을 습격해서 수상을
암살했습니다.
2. 2.26사건
1936년 2월 26일 이른 아침, 육군황도파인 노나카 시로 대위와 그를 따르는
청년장교가 1,483명의 병력을 이끌고 봉기했습니다. 쿠데타 이튿날 새벽, 동경
에 계엄령이 내려졌고 반란군에게는 원대복귀 명령이 하달되었습니다. 29일에는
2만 4천명의 진압군이 반란군을 포위하고, 천황 또한 이들을 반란군으로 규정하
자 명분과 사기를 잃은 군인들이 속속 복귀하면서 사태는 일단락 되었습니다. 그
뒤 군부(통제파)는 숙군과 질서회복을 명분으로 군부와 각료의 연립내각을 구성
하고 대규모 예산을 편성, 전투기와 전함 등의 건조에 박차를 가하며 군국주의체
제를 확실히 강화시키는 계기로 삼게 되었습니다.
중일전쟁
1. 중일전쟁의 시작
1937년 7월 7일 밤. 베이징 시 남쪽의 루거우차오(盧溝橋, 일명 마르코폴로
교)근처에서 일본군과 중국군의 작은 충돌이 있었다. 7월 11일의 이 사건은 양
국이 현지협정을 맺어 일단락된 듯이 보였다. 그렇지만 일본정부는 한국과 만주
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을 추가로 파병했다. 중국은 일본의 태도에 항의했고,
또 다시 소규모 전투가 벌어졌다. 7월 말에 일본군은 공격을 개시하여 베이징과
톈진을 점령했다. 루거우차오 사건이 발생한지 한 달 만에 전면전이 벌어졌던
것이다.
2. 중일 전면전
일본 본토에서 3개의 사단을 증파하여 베이징․톈진 지방으로 침략을 확대
하고 있던 일본은 8월 9일 상하이에서 발생한 일본군 장교 살해사건을 빌미
로 상하이에서도 침략행동을 확대하고(제2차 상하이 사변), 단호한 조치를
취하겠다는 사실상 전면 전쟁의 시작을 선언하는 정부 성명을 발표하여 상
하이 파견군을 편성․증파하였다. 일본은 8월 말 북지나 방면군 8개의 사단,
약 10만 명을 편성하여 화북 일대에도 침략을 확대하고, 9월에는 북지사변
(北支事變)을 지나사변(支那事變)이라 부르면서 중국 전역에 대한 군사침략
을 확대해 나갔단 것이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