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세계대전과아시아-일본과 식민지정책을 중심으로
- 최초 등록일
- 2021.02.22
- 최종 저작일
- 20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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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서론
2. 1차 세계대전과 일본
1) 일본의 참전배경
2) 일본의 21개조 요구
3) 파리강화회의와 일본
4) 워싱턴회의와 일본
3. 1차세계대전 이후 일본의 식민지정책
1) 중국의 5ㆍ4운동
2) 3ㆍ1운동
3) 간토대지진과 조선인 학살
4) 문화정치
4. 결론
5. 발표후기
본문내용
1914년부터 1930년의 시기는 1차세계대전의 발발로 구미국가들의 관심이 유럽에 쏠려있는 것을 틈타, 일본이 아시아의 현상을 타파하고 제국주의적 욕구를 충족시키려 하던 시기이다. 이 시기에 아시아 국제정치의 주도권이 미일 양국으로 넘어와 양국간의 대립이 표면화되기 시작하였다. 제1차대전은 유럽이 주무대였기 때문에 아시아 국가들이 참전하여야 할 이유는 별로 찾기 어려운 유럽의 전쟁이었으나 일본과 중국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참전하였다. 일본의 참전구실은 영일동맹조약 의무에 따른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으나 실제로는 중국에 있는 독일권익의 인수 및 중국본토에 대한 세력 확장을 꾀함으로써 아시아의 패자가 되려는 데 있었다.
또한 이 시기는 러시아가 동북아국제정치에서 배제된 시기였다. 1917년에 일어난 러시아 혁명으로 제정러시아를 붕괴시킨 소련 볼셰비키 정권은 유럽에서도 고립되어있지만 아시아에서도 국제적인 역할을 못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일본의 제국주의적 욕구를 일층 조장하여 러시아의 세력 하에 있던 북만주는 물론 연해주(沿海州) 일대까지 지배 하에 두려고 하였다. 이는 1918년의 시베리아 출병을 예로 들 수 있다.
미국은 계속해서 팽창해가는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중국을 연합국의 일원으로 전쟁에 참전시키고 파리강화회의에서 중국을 전폭 지지하였다. 당시 윌슨 미대통령의 ‘영구평화4원칙’과 ‘14개조’가 강화회의의 원칙으로 채택됨에 따라 여러 피압박민족에게 민족주의적 열기가 전파되면서 중국에서는 반일·반제국주의를 내건 ‘5·4운동’, 한국에서는 일제 식민지배에 항거하여 ‘3·1운동’이 일어났다. 1921년 11월, 파리강화회의에서 미해결된 동북아 문제 등을 논의하기 위해 미국의 워싱턴에서 국제회의가 열렸다. 제1차 세계대전을 통해 국제정치에 새로운 강자로 등장한 미국이 동북아에 새로운 국제질서를 구축하려 한 것이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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