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 이이의 성학집요
- 최초 등록일
- 2014.02.07
- 최종 저작일
- 20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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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율곡 이이의 생애
2. 성학집요의 주요내용
3. 율곡 이이의 인성론
4. 기철학의 신유학적 완성
본문내용
1. 율곡 이이의 생애
율곡 이이(李珥, 1536~1584)는 이황과 함께 조선 성리학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는 강릉 외가에서 1536년에 아버지 이원수와 어머니 신사임당 사이의 4남 3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현재 개풍군으로 불리는 덕수이다. 사헌부 감찰을 지낸 아버지를 비롯해 그의 집안은 대대로 벼슬을 지냈다. 선대의 농장이 파주 율곡리에 있었으므로 그의 호가 율곡(栗谷) 즉 밤골로 지어진 것이다. 어머니는 평산 신씨 신명화의 딸이다. 신명화는 조광조의 뜻을 따르는 무리로, 강릉 지역의 부호였다. 이이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결혼은 서울 양반과 강릉 부호의 결혼이었다. 신사임당의 사임은 주공을 잉태한 어머니를 부르는 이름이다. 이이가 나중에 훌륭한 학자가 되자 그렇게 부른 것이다.
그는 어려서 주로 외가에서 자라났다. 당시는 태어나면 일정기간 외가에서 자라는 것이 관례였다. 그는 그곳에서 신사임당의 교육을 받으며 경포대 등에 관한 기문을 짓는다. 6세 때 한양으로 올라왔지만, 한양과 강릉을 왕복한다. 13세 때 진사 초시에 합격하였다. 16세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3년 상을 치르고, 1년 동안 잠시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였는데 이때의 그의 이력은 평생을 쫓아다닌다. 승려는 당시 최하증의 신분으로 취급받았다. 양반이 승려가 된다고 하는 것은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이이의 반대파는 이것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 것이다. 20세에 다시 강릉으로 돌아온 그는《자경문》(自警文)을 지어 학문에의 입지를 확고히 하고 22세에는 노씨 부인과 결혼하였다. 23세 되던 해 봄에 도산으로 퇴계 선생을 배알하고 그해 겨울 별시에 《천도책》(天道策)으로 장원 급제한 것을 포함해 전부 9차례에 걸쳐 장원급제를 하였다. 그래서 이이를 흔히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고 부른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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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일철 ․ 윤사순 외 저, 『한국의 사상가 12인』, 현암사,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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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광욱 외 지음,『한권으로 읽는 한국철학』, 동녘,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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