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이황
- 최초 등록일
- 2011.04.17
- 최종 저작일
- 20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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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교육철학 시간에 퇴계 이황에 대한 시청각 자료 시청 후 감상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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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퇴계 이황’에 대한 시청각 자료를 보고
천 원짜리 지폐의 모델인 이황, 그에게는 진실한 스승, 덕망가 등 좋은 수식어가 많이 따른다. 이렇게 좋은 수식어가 항상 따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퇴계 이황의 사상은 현대 사회에서 윤리의식을 잊고 개인주의적인 생활을 하는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주고 있다.
퇴계 이황은 약 500년 전, 백성들은 생각하지 않고, 권력만을 앞세워 자기 밥그릇을 챙기기에 바빠 당파싸움이 끊이지 않던 시기에 당대의 문제점들을 꿰뚫고 그 문제를 해결한기 위한 방법들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퇴계 이황은 먼저, 참된 스승이었다. 그는 오늘날 돈을 받고 지식을 전달하는 선생과 제자사이가 아니라 진정한 스승과 제자 사이를 유지했다. 그 당시 사람들은 공부해서 과거급제를 해서 입신출세를 하기위해 공부했지만, 퇴계 이황은 수양과 실천을 강조하며 출세하기 위한 학문과는 거리가 먼 공부를 가르쳤다. 그래서 과거급제를 위해 공부하던 제자들이 그를 떠나기도 했지만, 그는 진정한 공부를 하는 인제 양성에 주력했다.
두 번째, 그는 여성관에 대해 열린 사고를 지닌 인물이었다. 유교 사상이 만연했던 그 시기에 여성들은 누구보다도 유교 사상에 묶여 살아가야 했다. 과부가 된 여성들은 시부모를 모시고 살면서 ‘열녀’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그런데 퇴계 이황은 과부가 된 며느리의 개가를 허락했다. 그것은 그 시대의 통념을 뛰어넘는 일이었다.
세 번째, 바람직한 공직자였다. 퇴계 이황은 공직 생활을 하면서 많은 벼슬아치들은 부정부패의 모습과 타락해 가는 조정을 보면서 80여회의 사직서를 올릴 정도로 공직에서 벗어나고 싶어했다. 항상 ‘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하고, 소박하며 근검절약을 하고 살았다. 오늘날, 우리나라 정치계에서는 이같은 인물이 절실히 필요한 때라고 생각한다.
네 번째, 자기수양에 철저했다. 그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자성록을 작성하면서 반성도 하고, 세상에 대한 걱정스러운 생각도 적었다. 그는 박식했는데도 항상 자기 자신을 낮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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