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입문
- 최초 등록일
- 2010.05.18
- 최종 저작일
- 20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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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사 입문 기말고사 정리 파일
목차
1. 친일파
2. 식민주의사관
3. 식민시대 한국사 인식
3. 사회경제사관
4. 북한의 한국사 시기구분
5. 70~80년대 한국사 인식
6. 만주지역 항일독립운동사와 김일성
7. 남북한의 연구경향
본문내용
1. 친일파
친일파 문제는, 해방이후 한국 사회가 해결하지 못한 역사적 과제로 남아있다. 친일파 청산 과정을 세 시기로 나누는데, 먼저 제 1기는 1945년부터 1960년까지로 친일파에 대한 객관적 연구가 불가능했던 연구의 불모기이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친일파를 등용했는데 행정 업무가 가능한 대졸의 70% 정도가 친일파였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특무사령관을 지낸 김창용, 헌병사령관을 지냈고 부산정치파동을 일으킨 원영덕, 서울시 초대 경찰부장인 장택상의 경우에서 보듯 친일파 숙청이 쉽지 않았다.
1948년 9월, 반민족행위자 조사특별위원회(반민특위)가 구성되었고 친일파 청산을 위한 작업에 들어가 680명의 A급 친일파를 체포했으나 1949년 9월 경찰이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하며 제대로 된 청산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당시 경찰의 대부분은 친일파 출신이었다.
제 2기는 1961년부터 70년대 말까지로 박정희 대통령의 집권기이다. 임종국은 반민족문제연구소를 개설(후에 민족문제 연구소로 개칭), 최초의 전문적 친일파 연구서인 『친일문학론』을 출판했다. 이 책을 통해 노천명, 서정주, 김활란 등의 친일파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으나 집권자인 박정희 대통령의 친일경력으로 인해 연구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제 3기는 1980년부터 2000년까지로 적극적으로 친일파에 관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친일파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게 된 것은 대표적인 친일파인 이완용의 후손들이 토지반환 소송을 제기한 사건이 알려지게 되면서부터 이다. 이완용이 친일행위를 통해 매입한 토지가 국고로 환수되었으나 후에 증손자가 토지명의변경신청을 했는데 아직도 명확한 결론이 나질 못했다. 또 김구선생 암살 배후에 대한 논란도 한 몫을 했다. 육군 소위 안두희가 김구선생을 암살한 게 표면적으로 들어난 전모이지만 아버지가 친일파였던 장택상이 그 배후라는 주장이 고개를 든 것이다.
이 시기엔 『청산하지 못한 역사- 한국 현대사를 움직인 친일파 60인』을 비롯, 『친일파란 무엇인가』, 『한․일간의 미청산 과제』, 『친일 인명 사전』등이 출판되며 관심을 끌었고 친일파진상규명위원회가 대통령 직속 기관으로 개설되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