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테르니히와 빈체제
- 최초 등록일
- 2007.11.12
- 최종 저작일
- 20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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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오스트리아의 재상 메테르니히와 그에 의해 주도되었던 빈 회의와 빈 체제에 대한 발표문입니다.
목차
Ⅰ. 서 론
Ⅱ. 본 론
1. 메테르니히의 생애
2. 빈 회의
3. 빈 체제
Ⅲ. 결 론
■ 참고문헌
본문내용
Ⅰ. 서 론
나폴레옹 몰락 후 설립한 빈 체제는 유럽의 현상 유지와 세력 균형을 도모하여 당시 급속하게 일어나고 있던 자유주의와 국민주의 운동을 억압한 보수적이고 반동적인 정치체제였다. 빈 체제는 1820년대 들어 그리스의 독립과 라틴아메리카 여러 나라들의 독립으로 위기에 직면하였고, 마침내 7월 혁명과 2월 혁명으로 붕괴되었다.
지금부터 빈체제를 주도하였던 오스트리아의 재상 메테르니히(Klemens von Metternich)와 그의 주도로 이루어졌던 빈 체제에 대해 알아보겠다.
Ⅱ. 본 론
1. 메테르니히의 생애
1773년 라인 지방의 유서 깊은 귀족가문 출신으로 1790년 마인츠대학교에 다니면서 마인츠 선거후(選擧侯)의 궁정에 드나들며, 당시 여기에 모여든 망명귀족들을 통하여 프랑스혁명을 알았다. 1792년 마인츠가 혁명군에게 점령당하자 부친이 있는 브뤼셀에 가서 부친을 도와 혁명의 파급을 막는 현실정치에 처음으로 참여하였다. 이러한 부친의 후광과 1795년 전(前) 재상인 카우니츠의 손녀와 결혼하여 정계로의 진출이 용이해졌다. 1801년 드레스덴 주재 공사, 1803년 베를린 주재 공사를 거쳐 1806년 파리 주재 공사가 되어 나폴레옹을 타도할 기회를 타진하였다. 1809년 오스트리아가 프랑스에 개전한 것도 그의 정세판단에 힘입은 바가 컸다. 그러나 이 전쟁은 패전으로 끝났다. 그 해 외무장관이 되었고, 프란츠 1세의 딸 루이즈와 나폴레옹의 결혼을 주선하기도 하여 프랑스와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 그 사이에 국력의 회복을 도모하였다.
1813년 여름 심기일전하여 대 나폴레옹 해방전쟁에 참가하여 승리한 후, 빈 회의 의장이 되어 유럽의 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외교상의 지도권을 장악하였다. 그 지도이념은 1815년에 만들어진 질서의 유지와 유럽 대국들의 세력균형이었다.
참고 자료
손영호 외 2, 서양사의 이해, 학지사, 1994
김장수, 서양근대사, 선학사, 2004
전영애, 독일이야기 1, 거름,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