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이후의 로마법
- 최초 등록일
- 2007.05.12
- 최종 저작일
- 2007.03
- 16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000원
소개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이후의 로마법에 대한 고찰
목차
1. 동로마제국에서의 로마법
①. 로마법대전의 주해
②. 에클로가 법전
③. 바실리카 시대
④. 말기의 법전
2. 서유럽에서 로마법학의 발전
①. 주석학파
②. 후기주석학파
③. 복고학파
④. 역사법학파
3. 유스티니아누스황제의 일생과 로마의 문화
①. 유스티니아누스황제의일생
②. 로마의 문화
본문내용
1. 동로마제국에서의 로마법
565년부터 1453년 동로마제국이 망할 때까지 약 9세기간 로마법은 다시 많은 변화를 겪었다. 로마가 정치적으로 이탈리아반도의 소도시에서 출발하여 대제국으로 발전하였다가 그 융성기를 지나 차츰 동방국으로 축소한 것과 대응하여 로마법도 시민법에서 고전시대에는 세계법으로 발전하였다가 이제는 다시 비잔틴, 그리스적인 동방로마의 지방법으로 쇠퇴하였다. 이리하여 로마법도 이제 고전시대의 법과는 절연되고, 세계법적 성격도 상실한 채 유스티니아누스법전을 기초로 새로운 변천을 하였다.
[ 로마법대전 ]
①. 로마법대전의 주해(565~7세기초)
유스티니아누스황제는 생전에 자기의 법전이 완벽한 것으로 믿고 혼란을 막기 위해 오직 법문의 충실한 번역과 내용의 요약만 허용하고 주해를 붙이는 것을 금하였다. 이에 위반하면 위죄로 엄벌에 처한다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이 금령은 황제의 생존시에도 이미 위반되었으며, 6세기 말에서 7세기 이후에는 ‘학설휘찬’ 또는 ‘칙법휘찬’에 대한 주해 또는 의해가 많이 나타났다. 그러나 그것은 막을 수 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로마법대전은 라틴어로 쓰였으나 유스티니아누스황제의 사망 후 동로마제국에서는 차차 그리스어가 사용되어 법전을 그리스어로 번역하여야 할 필요가 생겼으며, 또한 사회의 변천에 맞도록 주해를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특히 로마법대전의 편찬에도 참가하였던 콘스탄티노폴리스법학교의 교수인 테오필루스의 ‘법학제요’의 그리스어 의해는 10여종의 사본으로 전해지고 있다.
참고 자료
《출처 : 서양법제사 (최종고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