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비자의 법치주의
- 최초 등록일
- 2020.12.20
- 최종 저작일
- 2020.12
- 12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2,000원
* 본 문서(hwp)가 작성된 한글 프로그램 버전보다 낮은 한글 프로그램에서 열람할 경우 문서가 올바르게 표시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경우에는 최신패치가 되어 있는 2010 이상 버전이나 한글뷰어에서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소개글
"한비자의 법치주의"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한비자의 생애
2.《한비자》의 구성 및 내용
3. 한비자의 영향 및 평가
본문내용
한비자의 생애
한비자(韓非子, B.C 280~233)는 기원전 280년경 전국시대 약소국 중 하나였던 한(韓)나라의 명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래 이름은 한자(韓子)였으나 훗날 당나라의 한유(韓愈)와 구별하기 위하여 한비자(韓非子)로 부르게 되었다. 그는 귀족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말더듬이여서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외롭게 성장했다. 그러나 문장력은 매우 뛰어나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다.
사마천《사기》의 <노자한비열전>에서는 한비자의 전기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한비자는 한나라의 여러 공자(公子)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형명법술을 좋아했으며 이 학문을 노자와 장자의 학설에 귀착시켰다. 한비자는 말더듬이여서 언변은 뛰어나지 못했지만, 글을 매우 잘 썼다. 이사(李斯)와 함께 순경(荀卿)을 스승으로 섬겼는데 이사는 자기의 재주가 한비자를 따르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국칠웅(戰國七雄) 가운데 가장 약소국이었던 한(韓)나라는 서쪽의 진(秦)나라와 남쪽의 초(楚)나라 사이에 강대국들 틈 속에 끼여 국력이 점점 쇠약해져 갔다. 기원전 256년경이 되면 영토의 거의 절반 정도를 상실할 정도로 풍전등화 상태였다. 나라가 멸망의 위기에 처하자 한비자는 답답한 마음에 한왕(韓王)에게 여러 번 부국강병책을 건의하였으나 임금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자신의 충고가 매번 무시당하자 한비자는 자기 생각을 글로 쓰기 시작했다. 한비자는 강직한 선비들이 사악한 신하들 때문에 등용되지 못하는 현실을 매우 슬퍼하면서 이전 시대의 역사에서 성공과 실패의 변화를 면밀히 분석하여 <고분>, <오두>, <내외저>, <설림>, <세난> 등 10여만 자의 글을 지었다. 그는 행여 자신의 이론에 반론을 제기할만한 부분에 대한 논박까지도 글로 썼다.
참고 자료
한비자 지음, 김원중 옮김, 《한비자》, 휴머니스트, 2016.
성동호 지음, 《한비자》, 홍신문화사, 2008.
김예호 지음, 《한비자》, 한길사, 2010.
황준연 지음, 《한비자 읽기》, 세창미디어, 2012.
윤찬원 지음, 《한비자》, 살림,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