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화성행궁답사기
- 최초 등록일
- 2014.10.24
- 최종 저작일
- 20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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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머리말
2. 답사 과정
3. 보고 느낀 점
본문내용
1. 머리말
사적 제478호 화성행궁은 1789년(정조13년) 수원 신읍치 건설 후 팔달산 동쪽 기슭에건립되었다 수원부 관아와 행궁으로 사용되다가 1794년부터96년(정조18~20년)에 걸쳐 진행된 화성축성기간에 화성 행궁을 확대하여 최종 완성되었다, 효성이 지극하여 부친 장헌세자(사도세자)의 원침인 현릉원(현재의 융를)을 13차례나 찾았던 정조는 참배기간 내 화성행궁에서 유숙하였다.
건립 당시에는 600여칸으로 정궁 형태를 이루며 가장 규모가 크고 아름다운 행궁이었으나 일제 강점기 때와서 낙남헌을 제외한 시설이 일제의 민족문화와 역사 말살 정책으로 사라졌다.
1980년대말 뜻있는 지역 시민들이 복원추진 위원회를 구성하여 꾸준하고 적극적인 복원 운동을 펼친결과 1996년 복원공사가 시작되어 마침내 화성행궁 1단계 복원이 2003년10월 일반에게 공개하게 되었다.
<중 략>
낙남헌
득중정은 활을 쏘기 위해 세운 정자로 편액을 정조가 직접 써서 걸었고, 상량문은 홍양호가 짓고 썼다. 정조는 행차시에 매번 활쏘기를 하였는데, 1790년(정조 14)에 새로 만들어진 이 정자에서 활을 4발 쏘아 4발 모두 맞히고는 이를 기념하여 '득중정'이라고 한 것이다. 득중정은 "활을 쏘아 맞으면 제후가 될 수 있고, 맞지 않으면 제후가 될 수 없다(射中 則得爲諸侯 射不中 則不得爲諸侯)" 라고 한 구절에서 '득'자와 '중'자를 따서 붙인 것이다.
외정리소
정리소는 장차 1795년 을묘원행에서 펼쳐질 각종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1794년 12월에 설치한 임시 기관이었는데, 화성 성역이 끝난 후 외정리소라 하여 정조를 비롯한 역대 임금이 행차할 때 화성 행궁에서의 행사 준비를 담당하는 관청이 되었다. 처음에 정리소는 장용내영에 설치하였는데, 1796년(정조 20) 화성 행궁이 완성되면서 유여택 앞에 외정리소를 세우고 '외정리아문(外整理衙門)'이란 편액을 달았다.
참고 자료
수원문화재단 http://www.swcf.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