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
- 최초 등록일
- 2010.12.16
- 최종 저작일
- 20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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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비트겐슈타인의 생애와 그의 중심 사상인 언어철학에 대하여 <논고>와 <탐구>를 중심으로 서술한 글. 비트겐슈타인의 초기 입장과 후기 입장을 일목요연하게 비교할 수 있는 장점을 지닌 글이다.
목차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
1. 비트겐슈타인의 생애
2.《논고》에 나타난 전기입장
(1) 언어 그림이론
(2) 초기 비트겐슈타인 입장
3.《탐구》에 나타난 후기입장
(1) 언어 그림 이론에 대한 비판
(2) 언어 게임이론
3.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의의
본문내용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
1. 비트겐슈타인의 생애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1889년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부유한 철강 재벌의 5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엔지니어 출신의 아버지는 다뉴브 공국의 철강업계 리더였으며, 어머니는 비트겐슈타인 집안의 뛰어난 예술적 감수성의 모태였다. 사교성이 뛰어났던 비트겐슈타인의 집안은 슈만, 말러, 브람스 등과 같은 당대 최고의 음악가들과 깊은 교분을 맺어 왔으며 온 가족이 음악에 특출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라벨의 유명한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은 1차 세계대전에서 오른팔을 잃은 천재 피아니스트인 넷째 형 파울 비트겐슈타인을 위해 만들어진 곡이었다. 루트비히는 클라리넷 연주와 지휘에 조예가 깊었고, 그의 휘파람은 교향곡을 소화할 수 있는 실력이었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 가문의 운명은 그리 평탄하지 않았다. 루트비히가 13세 되던 해에 큰형이 자살하고, 2년 뒤 둘째 형도 세상을 떠났으며 셋째 형도 1차 세계대전 때 목숨을 끊었고, 넷째 형은 오른 팔이 불구가 되었다.
루트비히는 당시 부잣집 자녀들이 흔히 그러했듯이 14세까지는 집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 후로 북부 오스트리아의 린츠에서 물리학을 배웠고, 이어서 베를린의 기술고등학교를 마쳤다. 1908년 영국으로 건너간 그는 당초 맨체스터 대학의 연구생으로서 항공공학을 공부했으나 점차 그의 관심은 순수과학과 수학의 기초를 거쳐 마침내 철학에까지 미치게 되어 1912년 케임브리지 대학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했다. 여기서 그의 철학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의 하나인 버트란트 러셀의 강의를 들으며 그와 사제 관계를 넘어 동료로서 교분을 나누게 된다. 일찍부터 비트겐슈타인은 자기를 가르친 철학자들에게 오히려 더 깊은 영향을 주는 천재성을 발휘했다. 심지어 그의 스승인 조지 무어는 1930년대에 비트겐슈타인의 수업을 청강하기도 하였다. 1914년 1차 대전이 터지자 비트겐슈타인은 탈장 때문에 병역에 면제 대상이었지만 자원입대하여 조국 오스트리아 군대의 장교로 참전했다. 1918년 남부 전선에서 이탈리아군의 포로가 된 그의 배낭 속에는 《논리-철학논고》가 들어 있었다.
참고 자료
<참고문헌>
1. 비트겐슈타인 저, 이영철 역, 《철학적 탐구》, 서광사, 1994.
2. 비트겐슈타인 저, 이영철 옮김,《논리철학논고》, 천지, 1991.
3. 조지 핏처, 방영식 역,《비트겐슈타인의 철학》, 서광사, 1995.
4. 분석철학연구회,《비트겐슈타인의 이해》, 서광사, 1995.
5. 한국분석철학회 편,《비트겐슈타인과 분석철학의 전개》, 철학과현실사, 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