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재, 박은식
- 최초 등록일
- 2010.09.17
- 최종 저작일
- 20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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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이상재, 박은식
목차
박은식(1859~1925)
-생애
-주자학의 수학
-박은식에 대한 평가
-교육활동--언론을 통해 강조
-교육의 방법
-역사인식
이상재(1850~1927)
-출생 및 성장
-이상재 생애의 특징
본문내용
박은식(1859~1925)
제2대 임시정부 대통령 선임
임정의 혼란 수습, 정권이양 담당
민족주의 사학자
<<한국통사>>·<<한국독립운동지혈사>> 저술
조선 말기·일제강점기의 학자·언론인·독립운동가.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성칠(聖七),
호는 겸곡(謙谷)·백암(白巖).
황해도 황주 출생.
농촌 서당 훈장 용호(用浩)의 아들
국권을 잃은 후 중국에 망명해 독립운동에 종사할 때에는 박기정(朴箕貞)이라는 별명을 쓰기도 했고, 태백광노(太白狂奴) 또는 무치생(無恥生)의 별호를 쓰기도 함
생애
10세부터 17세까지 아버지의 서당에서 정통파 성리학과 과거시험 공부
황해도 일대에서 이름나 있던 안태훈(安泰勳 : 安重根의 아버지)과 교우하면서 문장을 겨루어 황해도의 양 신동이라는 평을 듣기도 함
21세 1880년(고종 17)에 경기도 광주 두릉(斗陵)에 사는 정약용(丁若鏞)의 제자인 신기영(申耆永)과 정관섭(丁觀燮)을 찾아가서 정약용이 저술한 학문을 섭렵하면서 실사구시의 학풍을 접함
23세 1882년에 상경해 서울에 머무는 동안 7월의 임오군란을 목격하고 시무책을 지어 국왕에 제출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실망해 낙향, 태천(泰川)의 큰 학자 박문일(朴文一)의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 연구
26세 1885년 어머니의 요구에 따라 향시에 응시해서 특선으로 뽑힘
1888년부터 1894년 갑오경장이 일어날 때까지 6년간 능참봉을 한 것이 관직생활의 전부
1898년에 독립협회의 사상과 운동의 영향을 받고 성리학과 위정척사사상에서 개화사상으로 전환
(이하생략)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