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이상화
- 최초 등록일
- 2010.04.06
- 최종 저작일
- 2010.03
- 5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500원
소개글
현대시인론 수업시간에 이상화에 대해 발표하기 위해 만든 자료 입니다.
시인약력과 현재까지의 연구지형, 작품세계에 대한 분석과 시인과 관련된
몇가지 쟁점을 비롯하여 발표자의 의견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목차
1.시인약력
2.연구지형
3.작품세계
4.쟁점
5.기타의견
본문내용
1. 시인약력
이상화는 1901년 4월 5일 대구 서문로에서 태어났다. 7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14세가 될 때까지 큰아버지의 훈도를 받으며 수학하였다. 15세에 경성중앙 학교에 진학하였지만 학업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삶에 대한 번민을 느껴 방황하다가 18세에 수개월간 강원도 일대를 풍찬노숙 하였다. 3․ 1운동이 일어나자 백기만과 대구 학생 시위운동을 계획하고 지휘하였는데 결국 사전에 발각되어 서울로 도주하게 되었다. 실패로 끝난 거사이지만 이는 이상화로 하여금 자아에 대한 각성과 민족에 대한 재발견의 계기가 된다. 1922년에 《백조》동인이 되어 「말세의 비탄」,「단조」등을 발표하며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한다. 일본 동경의 ‘아테네 프랑스’학교에서 유학하던 이상화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나의 침실로」를 발표하였고, 1923년에 관동대지진을 겪으면서 귀국한다. 망국민의 비애를 절감하고 차츰 당대 민족 현실과 민중적 참상에 대한 관심을 가지면서 1925년에 김기진 등과 ‘파스큘라’를 결성한다. 이로써 이상화는 경향파 문학에 가담하게 된 것이다. 1926년 발표한「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개벽》를 통해 민중적 인간 해방으로서 민족 문학의 경향성을 표출한다. 이 해에 동경에서 사귄 유보화와 또한 그의 첫아들이 사망을 하면서 이상화는 절망에 빠지게 된다. 1927년에는 의열단 이종암 사건에 연루되어 구금되기도 하였으며, 1934년에는《조선일보》경북 총국을 경영하면서「역천」등의 작품을 발표한다. 1937년 대구 교남학교에서 무보수 강사로 근무하다가 1943년 위암으로 사망한다. 이상화는 1922년~1928년까지 가장 활발한 문학 활동을 하였고 시67편, 산문22편, 번역소설5편을 남겼다.
2. 연구지형
1928년 이후 이상화의 발자취를 찾는 것은 다른 시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어려운 일이었으며, 그를 연구한 논문이나 그의 이름으로 출판 된 책들에서 시의 제목이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발견되기도 한다. 그 이유는 이상화가 생전에 자력으로 직접 책을 발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1951년에 들어서야 백기만이 『상화와 고월(이장희)』을 발간하였으나 이상화의 시작품 16편만을 수록하였을 뿐이다. 1973년 9월에 비로소 『상화시집』이 출간되었으며 1987년에 겨우 『나의 침실로』라는 작품집이 이상화의 이름을 달고 나왔기 때문에 그에 대한 연구 또한 늦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을 이유로 하여 이상화에 대한 연구는 1980년대까지 활발하지 못했으며, 그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 논문은 십 여 편 정도로 많지 않은 편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연구 논문은 많은 부분이 1922년부터 1928년대까지로 국한되어있으며,
참고 자료
본문에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