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 그는 정말 폭군이었나
- 최초 등록일
- 2009.11.15
- 최종 저작일
- 20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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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광해군, 그는 정말 폭군이었나
광해군에 관한 자료입니다.
목차
1. 광해군의 선정 이유 - 역사 속에 철저히 외면 당해온 광해군
2. 광해군과 임진왜란
1) 왕세자 책봉과 ‘분조’활동
2) 즉위를 향한 멀고도 험한 길.
3. 왕권강화의 의지와 멸망, 그리고 집착
1) 어머니를 폐하고 동생을 죽인 패륜군주다?!
2) 광해군이 궁궐공사에 매달린 까닭
4. 공세적인 대명외교
5. 권력 16년, 춘몽 16년
1) 광해군의 폐위 - 서인, 인조반정을 일으키다.
2) 인조와 반정주체들의 고민
3)인조반정 이후의 대외정책
6. 광해군을 어떻게 볼 것인가….
본문내용
1. 광해군의 선정 이유 - 역사 속에 철저히 외면 당해온 광해군
광해군은 인조반정으로 재위 15년 만에 왕위에서 쫓겨난 비운의 군주이다. 따라서 ‘조(祖)’나 ‘종(宗)’ 등의 칭호가 주어지지도 않았다. 그래서인지 광해군 하면 그저 쫓겨난 왕, 혹은 폭군이라는 이미지 정도이다. 그러나 몇 년 전, ‘불멸의 이순신’이라는 드라마에 등장했던 광해군은 임진왜란 때에 백성들을 다독이고, 전쟁터에서 사기를 드높이는 군주의 모습이었다. 학창시절 역사를 가르치던 선생님께서 광해군 대목을 가르치실 때도 광해군이 실리외교를 추구였고, 전후 피폐해진 조선을 재건하려 노력했던 현명한 군주라고 설명하셨었다. 그렇게 현명하고 어진 임금인 광해군은 왜 궁에서 쫓겨나게 된 걸까?
사실 광해군은 15년이란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왕위에 있었지만 광해군이 어떤 왕이었는지 그리고 왜 쫓겨났는지 잘 알지 못한다. 이에는 인조반정 이후 광해군 일기를 승자들의 입맛에 맞게 개편해 내어 후대에 진실을 파악하기 어렵게끔 만든 데에도 이유가 있을 것이다. 반정에 성공하여 정권을 잡은 이들이 광해군을 의도적으로 폭군으로 묘사하였기 때문이다. 이번 기회에 광해군의 업적과 내정, 외교에 대해 알아보면서 광해군을 제대로 이해하는데 실마리를 얻어보고자 한다.
2. 광해군과 임진왜란
1) 왕세자 책봉과 ‘분조’활동
광해군은 1575년에 후궁인 공빈 김씨와 선조 사이에서 둘째 왕자로 태어나 1592년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본래 선조에게는 정비로서 의인왕후 박씨가 있었지만 그 사이에는 아들이 없었다. 대신 그는 여덟 후궁과의 사이에 열세 아들을 두었는데, 그 중 광해군은 공빈 김씨의 차자였다. 그가 정비에게서 태어난 적장자가 아닌 차자의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왕세자로 책봉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임진왜란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이 파죽지세로 북상하자, 피난보따리를 싸야 했던 상황에서 선조는 4월 29일 광해군을 전격적으로 왕세자로 책봉한다. 임진왜란 발발 직후의 상황이 선조에게는 그만큼 절박하게 인식되었던 것의 반증이라 할 수 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