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세기』 초록본이 위작이라고 주장하는 견해를 대표하는 노태돈 교수는 『화랑세기』 초록본에서 발견되는 향가의 형식이 최소 삼국유사가 저술된 시점 이후의 것이라는 점과, 상식적으로 ... 색(色)적 요소들도 여성의 행동에 제약을 가하는 사회적 벽의 극단적 전형으로서의 ‘문란함’을 근본적으로 부정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임을 파악해 수용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 노태돈
노태돈은 고찰 대상을 건국자에서 지배 집단으로 확대하고 그 민족적 계보를 구명하여 고구려인 다수의 참여를 논증했다. ... 노태돈은 「발해인(土人 ; 지배자층)은 고구려인을 중심으로 해서 고구려화되었던 일부 말갈인이 이에 융합되어 형성된 족속이었고, 발해인은 고구려 계승 의식을 명백히 지니고 있었다」고
「화랑세기」가 위작(僞作)이라고 주장하는 대표 학자는 노태돈 교수(서울대 국사의 시작은 1995년 역사학회세미나에서였다. ... 이종욱 교수가 이 해 4월 제325회 세미나에서 발췌본 「화랑세기」의 가치를 공식적으로 처음 인정하는 발표를 하자 노태돈교수가 두 달 후 열린 한국고대사연구회 월례발표회에서 이교수의 ... 우선 위서를 주장하는 학자들의 견해에서 노태돈교수는 97년 「한국사연구」에 발표한 또 다른 글에서 박창화가 지은「도홍기(桃紅記)」 「홍수동기(紅樹洞記)」 「어을우동기(於乙于同記)」등
노태돈은 위의 논문에서 ‘풍속검토’라는 부분에서 모본의 검토를 통해 마복자(摩腹子)),사함(謝函)),세함(洗函 ))과 같은 풍속을 들어 상징적인 표현을 하는 어떤 의식을 행하는 것은 ... 1995년 4월에 열린 ‘역사학회 제325회 월례연구발표회’에서 필사본『화랑세기』(당시에는 필사본이었지만, 후엔 발췌본으로 밝혀짐)의 사료적 가치를 인정하는 이종욱과 그에 맞서서 노태돈은 ... 우선 노태돈은 위에 그의 논문에서 모본에 기술된 화랑도의 성격변화에 관한 서술은 납득이 가는 면을 지녔지만, 화랑도의 무사단적인 면에서는 김대 같이 필사본을 둘러싸고 진위논란이 해결되지
이는 80년대 이후 우리학계의 대표적인 견해로 천관우, 서영수, 노태돈, 윤내현 등에 의해 주장되고 있다. ... 본고에서는 중심지 이동설과 대동강 중심설을 각각 노태돈과 윤내현, 송호정과 북한학계를 중심으로 하여 그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Ⅱ. ... 노태돈, 『단군과 고조선사』, 사계절출판, 2000. 단군학회 엮음,『(남북 학자들이 함께 쓴)단군과 고조선 연구』, 지식산업사, 2005.
그러면 부체제에 대한 개념정리를 해보고 노태돈 교수의 삼국의 정치체제에 대한 입장을 살펴보는 것으로 발표를 마칠까 한다. ... 맺음말 - 노태돈 교수의 부체제에 대한 개념 정리 및 삼국 정치 체제에 대한 입장 이상에서 초기 고대국가의 국가 구조와 정치운영을 부체제론을 중심으로 이야기 해보았다.
노태돈이 인간의 본능의 하나인 질투와 부부간 성적 독점권을 주장한 견해는 한마디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유교적 도덕관·윤리관을 신라 시대의 남녀관계에 적용시키는 것을 말한다. ... 노태돈은 花郞世記에 나오고 있는 摩腹子를 예로 들어 분방한 성관계가 있었고 이런 예는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없다고 하여 그러한 사실이 조정내 질서를 유지할수 있는 가에 의문을 제기하고
강봉룡, 앞의 책, pp.181-182. ) 노태돈,『단군과 고조선사』, 사계절, 2000, pp.97-118. )『三國史記』卷4,「新羅本紀」, 智證王條 六年 春正月 王親定國內州郡縣 ... 성격과 위치」,『신라문화』21, 2003, pp.23. ) ‘奴人’을 새로이 신라 영토로 편입된 변방의 주민으로 파악한 견해(주보돈) 및 집단예민과 같은 피복속민으로 보는 견해(노태돈
, 2000,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노태돈, 1988,「5세기 금석문에 보이는 고구려인의 천하관」, 『한국사론』19, 서울대 국사학과. ) 노태돈, 『고구려사 연구』, pp. ... 박동석역, 1985, 『광개토왕비연구』, 역민사, p. 178. ) 노태돈, 「5세기 금석문에 보이는 고구려인들의 천하관」, p. 4. ) 위의 글, p. 4. ) 왕건군? ... 두 칸의 석실로 된 그의 무덤 앞 칸 벽에는 회칠을 한 위에 81행 800여 자의 墓誌가 쓰여 있는데, 그 중 200여자가 판독되어 있다(노태돈, 『고구려사 연구』, p. 145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