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 같은 효과적인 해석은 노태돈 교수의 논문「연개소문 - 무모한 대외강경론자, 포악한 권력자」에서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 노태돈 교수는 연개소문에 대해서 그가 대외강경론자였는가와 흉폭한 독재자였는가의 측면에서 분석하였다. 그는 연개소문은 분명히 대외강경론자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던 중, 1995년 서울대 노태돈 교수에 의해 1989년 발견된『화랑세기』보다 더 자세한 책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다. ... 다음으로 화랑세기가 위작이라고 주장하는 노태돈(盧泰敦)의 견해가 있다. 그는 일서(逸書)의 진위를 검증하는 방법으로는, 책 자체의 형식과 내용을 분석?
→노태돈 교수의 반박 : 노태돈 교수는 이 향가는 향가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진 1930년대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라 하여 이 책을 위작이라고 하였다. ... 필사본 화랑세기의 가치에 대한 입장들 ①노태돈 교수의 주장 : 노태돈 교수는 필사본 화랑세기가 김대문의 저서가 아닌 것은 확실한 만큼, 화랑세기는 위작이라 하였다. ... 용어를 통해 본 진위 논쟁 ①노태돈 교수의 주장 : 노태돈 교수는『화랑세기』에 나오는 궁주(宮主)·전주(殿主)·전군(殿君)·모계(母系)·야인(野人)·수노청예(首露靑裔)와 같은 용어에
노태돈, 1982, 앞의 글. ... 노태돈, 1982, 앞의 글에서는 역사계승인식을 중심으로 내용이 검토되고 있다. 하면서 고조선과 단군을 명실공히 我邦 역사의 시작과 그 시조로서 강조하고 있다. ... 강조하려는 것은 당시 민족기원 문제에 주체사상이 적극 반영됨으로써 혈연, 인종을 민족의 주요 개념으로 설정한 위에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한민족이 상고시대부터 형성되어 왔다는 인식 노태돈
, ,《고구려사 연구》, 1999, p112. ) 노태돈, ,《고구려사 연구》, 1999, pp.98~100. ... 현도군 설치 이전부터 존재 하여 B.C 75년에는 고구려가 국가형태를 취하고 주위의 국가들과 연합하고 있었다. ) 김정배, , 《백산학보》14, 1973. ) 노태돈
노태돈, 위의 글 그런데 이종욱은 그렇게 문란한 사회상이 오히려 사료의 신빙성을 높여주는 것이라 하였다. ... 이종욱, 1995, 위의 글 이상의 노태돈과 이종욱의 논쟁은 같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서로 자신이 생각한 역사상에 『花郞世記』의 진위 여부를 맞추고 있는 것이다. ... 노태돈은 '부부간의 성관계에 관한 어떤 규범은 존재하여야 그 사회의 기본적인 질서가 유지될 수 있다'라고 말하며 그 사실성을 부정하고 있는데, 이는 극히 현재적인 관점이라 생각된다.
이와는 다르게 대조영을 속말강 유역에 거주하였던 고구려변경의 고구려인 즉 고구려 별종이라 하여 [신·구당서]의 기록을 절충하려는 노태돈의 견해가 있다. ... (주:노태돈, '발해국의 주민구성과 발해인의 족원:한국고대의 국가와 사회', 일조각, 1985) 건국자인 대조영의 출자 발해사 연구의 쟁점 2) 말갈족의 해석 문제 말갈의 종족적 연원에
그러던 중, 1995년 서울대 노태돈 교수에 의해 89년 발견된 화랑세기보다 더 자세한 책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다. ... [반대측 주장] [僞作]“1930년대 이후 저술됐을 가능성” 후대에 나온 ‘삼국사기’ 참고했을 수도 노태돈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1 989년 2월 필사본 ‘화랑세기’가 처음 세상에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읽게된 노태돈 선생의 「연개소문과 김춘추」는 꾀나 나에게 유익한 글이었다. ... 우선 노태돈교수의 글에서처럼 삼국초기부터 삼국의 민들이 동일한 존재양태를 지녔고 서로간에 뚜렷한 동족의식을 지녔다는 것은 비역사적인 것이었다. ... 노태돈 교수는 이 글에서 동족의식은 삼국이 중앙집권적인 영역국가로 성장해 나감과 함께, 사회분화가 심화되어 공동체적 관계의 해체를 촉진하고 제지역 간의 발전의 불균등이 완화 되었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