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 복원에 대한 평가
- 최초 등록일
- 2008.06.02
- 최종 저작일
- 20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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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청계천 복원에 관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청계천 복원정책의 개요
Ⅱ. 그 동안의 진행상황과 평가
Ⅲ. 평가
Ⅳ. 성공사례
Ⅴ. 청계천 복원 정책의 교훈
본문내용
Ⅰ. 청계천 복원정책의 개요
● 청계천은 도성 주변의 산과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들이 모여 도성 한가운데를 동으로 가로질러 흐르는 도심하천이었다.
조선시대에는 `개천`이라 불렀는데, 이것은 `내를 파내다`라는 뜻으로 청계천이 자연하천이 아니라 생활의 필요에 의하며 어느 정도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인공하천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청계천은 하천 조성과정이나 도시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다는 지리적인 위치 상 조선왕조 500년 동안, 근대 100년 동안의 서울의 역사문화, 서울사람들의 일상생활에 많은 영향을 주게된 것은 필연적이었다. 도심하천으로서 청계천이 자연스럽게 가지게 된 기능은 하수도로서의 기능이었다.
사실 수도 서울이 조선왕조 500년 동안 우리 나라 역사문화의 중심지로서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청계천이라는 거대한 하수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청계천으로 흘러 들어오는 지천을 통해서 서울 곳곳에 생명수가 전달될 수 있었으며, 반대로 서울 곳곳에서 버려지는 더러운 것이 청계천을 통해서 배설됨으로써 도시 전체가 깨끗하게 유지될 수 있었다. 한마디로 청계천은 수도 서울의 중요한 배설기관이었다.
청계천은 조선시대 역대 임금들이 왕정(王政)을 펼친 정치적인 공간이었다.
조선왕조의 기틀을 잡은 제3대 태종은 수도건설, 시전(市廛) 설치와 함께 개천을 정비함으로써 서울의 도시형태가 완성되었다. 제4대 세종은 개천으로 흘러 들어오는 지천을 정비하였으며, 개천에 흐르는 물의 깊이를 미리 헤아리기 위해 수표(水標)를 설치하였다. 무엇보다도 개천의 성격을 도심 속의 생활하천으로 규정함으로써 이후 개천이 서울사람들의 일상생활과 함께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후기에는 제21대 영조는 개천을 준설하고 정비하는 대대적인 역사를 일으켰다. 스스로 자신이 80평생 동안 한 3가지 일 중의 하나가 준천이라고 말할 정도로 개천의 준설과 정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후 개천 준설작업은 영조의 준천을 표준으로 지속적으로 시행되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