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사]나운규
- 최초 등록일
- 2006.11.01
- 최종 저작일
- 20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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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나운규에 대한 조사를 했습니다.
한국영화사 시간에 한 것이라 나운규와 영화에 대한 조사입니다.
목차
<나운규의 출생과 집안 내력>
<나운규의 생애와 업적>
<나운규의 작품 세계>
<나운규의 작품연보>
<나운규의 삶과 예술>
본문내용
<나운규의 출생과 집안 내력>
나운규는 1902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나 1937년 8월 9일 오전 1시 25분에 36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그는 1924년 조선 키네마 주식회사의 연구생으로 들어가 2년 후인 1926년에 <아리랑>을 처음 제작하였고 1936년 <오몽녀>를 마지막 작품으로 남겼다.
그는 약 10년에 걸쳐 20여 편의 작품을 남긴 당대 최다, 최고의 감독이자 배우였다. 그러나 그만큼 그는 당시의 열악한 영화제작 조건 속에서 영욕이 겹친 삶을 살았고 많은 일화를 남겼다. 역사서술에 가정이 허락된다면, 나운규가 빠진 일제하 조선영화사는 대단히 빈약했을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나운규에 대한 연구와 기록은 유독 다른 부분에 비해 풍부하고 또 한편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과장된 표현으로 채워져 있다. 당시의 민족해방운동이라던가 다른 분야의 예술이 남긴 업적과 비교한다면 그다지 대단할 것도 못되는 나운규의 활동과 작품이 이처럼 신화화되고 있는 까닭은 나운규 이후 그를 총체적으로 뛰어넘는 영화인과 작품이 나오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나운규의 출생에 관한 기록은 대체로 1902년으로 모아진다. 그러나 <한국연극.무용.영화사전>에는 1904년 출생으로 되어 있고, 북한에서 간행된 <문학예술사전>에는 1901년으로 되어 있다. 나운규가 사망한 때가 1937년 8월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고 그가 36살에 죽었다는 것에도 별다른 이견이 없다. 따라서 <한국연극.무용.영화사전>에 쓰인 1904년 설은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더구나 유현목 , 이영일 등은 각자 자신들이 쓴 <한국영화발달사> <한국영화전사>에서 나운규의 출생년도를 1902년이라 적고 있다. 그러나 1901년 설은 북한의 가록이기도 하지만 1991년 문화부가 발간한 <아리랑을 만들 때>를 편집한 김종욱은 “이제까지는 춘사가 1902년 10월 17일생으로 알려져 왔는데,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