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으로 본 낙랑군(우리 시대의 한국고대사1)
- 최초 등록일
- 2021.06.14
- 최종 저작일
- 20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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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400년간 존속해온 낙랑군에 대한 레포트입니다.
낙랑군이 우리나라에 들어선 과정부터
멸망하기까지의 역사를 찬찬히 살피고자 하였습니다.
그리고 낙랑군이 현재 우리나라 역사에서 어떠한 위치에 놓여있는지
고찰하고자 하였습니다.
이 레포트는 한국고대사 강의 과제로 작성하였으며
글 뿐만 아니라 그림도 함께 첨부하여 구성력을 높이고자 하였습니다.
레포트는 [우리시대의 한국고대사1]의 저서를 중심으로 작성하였으며
이 레포트를 작성하고 A+를 받았습니다.
레포트 사용하시면 분명 좋은 점수 받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목차
Ⅰ. 들어가는 말
Ⅱ. 본론
1. 한군현과 초기국가의 관계
2. 낙랑고고학의 성립
3. 낙랑고고학과 식민주의의 확산
4. 낙랑고고학과 명문자료
Ⅲ. 나오는 말
본문내용
Ⅰ. 들어가는 말
고조선은 한국사상 차지하는 의의가 크다. 고조선은 한국의 초기국가 형성의 방아쇠를 당겨 주었고 현대의 우리가 설정한 한민족의 출발점이 되고 있다. 고조선은 기원전 108년에 한(漢)의 침략을 받아 멸망되고 그 자리에 낙랑군이 설치되었다. 한국 역사학계는 기원전 108년에서 기원후 313년까지 존속한 낙랑군을 한국사에 포함시키기를 꺼려왔다. 그러나 낙랑군에 살던 사람들의 대부분은 고조선인들이었다. 따라서 일제강점기의 한국을 한국사에 포함시켜 다루듯, 낙랑이 설치된 시기의 조선을 낙랑조선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이러한 낙랑조선을 한국사에서 당당하게 다루어 마땅하다.
낙랑군은 고조선에 설치된 한의 군현으로, 기원전 108년에서 기원 313년까지 420여 년간 한반도 서북지방에 존속하였다. 고조선을 토대로 하였고 시기적 · 지역적으로 삼한 및 삼국문화의 형성과 발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한국 고대사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낙랑군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조선후기 실학자들에 의한 한사군의 역사지리적 위치 고증작업에서 시작되었다. 조선후기 실학자들의 연구는 한백겸 『동국지리지』 이익 『성호사설』 등의 연구서에 수록되어 있으며 왜란과 호란 후 새로운 역사의식에 기반하여 실증적 역사지리 연구가 집대성된 사서들이 잇달아 편찬되었다. 이 과정에서 한사군의 지리고증에 대해서도 여러 견해들이 제기되었다.
20세기 들어 일제는 제국대학 학자들을 중심으로 식민지 조사의 일환으로 ‘고적조사’라는 미명 하에 고고학 조사를 실시했다. 고고학 조사 과정에서 낙랑군의 평양 존재를 입증해 주는 다수의 명문 자료들이 확인되었고 다수의 낙랑고분들도 발굴하였다. 이러한 자료들은 낙랑군의 위치 문제와 아울러 식민주의 역사관 정립에 결정적인 근거가 되었다.
본론
1. 한군현과 초기국가의 관계
한 무제가 설치하였던 한 4군은 변동 과정을 거쳤다. 기원전 82년에 임둔군과 진번군을 파하여 낙랑군과 현도군에 합친 바 있다. 그리고 기원전 75년에는 현도군이 그 관할 하에 있던 예맥인들의 침공을 받아 그 치소를 흥경 · 노성 방면으로 옮겼다. 그와는 달리 낙랑군은 4백여 년을 넘게 존속하였다.
참고 자료
우리 시대의 한국고대사 1(한국고대사학회 편), 2017
이종욱, 역사충돌, 2003
김은석, 선생님이 궁금해하는 한국 고대사의 비밀, 2011
이종욱, 『고조선사연구』,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