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정말 자세하게 정리하였습니다. 잘 할용하세요!!목차
Ⅰ. 머리말Ⅱ. 낙랑 재 평양설과 식민사학
1. 낙랑군 VS 낙랑국
2. 낙랑 재 평양설과 식민사학과의 관계에 대한 인식
Ⅲ. 낙랑 재 평양설에 대한 기존의 연구
Ⅳ. 낙랑 재 평양설에 대한 재고찰
1. 낙랑 재 평양설에 대한 서지학적 고찰
1) 국외의 사서
2) 국내의 사서
2. 낙랑 재 평양설에 대한 고고학적 고찰
Ⅴ.맺음말
본문내용
Ⅰ 머리말예전에 비해 많은 부분 변화가 된 건 사실이지만,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스스로 반만년이라 칭하면서 실상 그 절반에 해당하는 부분의 역사에 대해선 단군과 고조선이라는 이름만 있을뿐 그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역사서술을 장기간 해왔다. 그로 인해 역사서술도 고조선 말의 부분만 상세히 다룸으로써 실상 고조선의 강역과 역사를 축소 서술해온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특히 고조선의 멸망과 한사군의 설치로 이어지는 중요한 고대사의 부분을 우리는 일인학자들의 힘을 빌려 이론을 정립하고 지금도 그것이 마치 사살인양 배우고 있다.
우리가 근대에 스스로 발전하지 못하고 일제의 식민지로 떨어진 역사는 한국인에게는 치욕스러운 역사다. 하지만, 이를 부정할 순 없다. 왜냐면 그것은 사실fact이기 때문이다. 어찌되었든 역사적 사실이 아무리 치욕스러워도 그것이 거짓이 아니라면 우리는 부정할 수 없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한사군을 부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왜 한사군이 한반도 북부에 있었냐는 것이다. 만일 이것이 진실이라면 나는 할말이 없겠지만, 내가 공부하고 연구해본봐에 의하면 한반도 북부에 있어야할 한사군의 실체에 대해 나는 고개를 갸우뚱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왜 한사군은 그곳에 존재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나의 의견을 사서학적고찰과 유물학적고찰을 통해 재론해 보고자 한다.
Ⅱ. 낙랑 재 평양설과 식민사학
1. 낙랑군 VS 낙랑국
먼저 우리는 한사군의 위치에 관한 논의 하기 전에 낙랑군에 대한 그리고 낙랑군과는 다른 낙랑국에 대해 확실히 언급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1)낙랑군
주지하다시피, 준왕을 몰아내고 집권한 위만은 중국 국경 밖의 오랑캐를 지켜 변경을 침략하지 못하게 하는 외신의 임무에 대한 대가로 군사적 위세와 재물을 얻어 주변지역을 침략하고, 진번과 임둔 등도 모두 복속하여 그 영역이 사방 수천 리가 되었다. 그 뒤 고조선의 마지막 왕인 우거에 이르러서는 더욱 강성해져 남쪽의 진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가 한과 직접 통교하는 것을 가로막고 중계무역의 이익을 독점하였다. 이러한 고조선의 세력확장에 대한 불만과 고조선이 흉노와 연결되는 것을 막기 위해 한은 마침내 BC 109년 육군 5만과 수군 7천을 동원해 고조선을 침략하였다. 고조선은 끈질기게 저항하였지만,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지배층의 분열이 나타났다. 결국 BC 108년 우거왕이 살해되고 왕검성이 함락되면서 멸망하였다. 한은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바로 그해에 위만조선의 판도 안에다 낙랑 진번 임둔의 세군을 두고 그 다음해에 예의 땅에 현도군을 두어 소위 한의 4군이 성립되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우리가 한사군이라 부르는 실체로 진번군과 임둔군은 BC 82년에 낙랑군과 현도군에 합쳐지고 현도군은 BC 75년에 서북지역으로 축출되었다. 낙랑군은 313년 미천왕에 의해 소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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