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당 정인보 선생의 한국고대사 인식
- 최초 등록일
- 2021.05.10
- 최종 저작일
- 20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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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위당 정인보 선생의 한국고대사 인식"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Ⅰ. 서 론
Ⅱ. 고대사 인식의 배경
Ⅲ. 단군론과 상고사의 체계화
Ⅳ. 대중국 투쟁
Ⅴ. 고증방법과 사료독법(史料讀法)
Ⅵ. 맺음말
참고 문헌
본문내용
Ⅰ. 서 론
정인보(1893~1950)는 구한말에 태어나 일제 강점기와 해방정국을 거쳐 한국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활동했던 한국의 대표적 지성인이요, 국학자다. 1935년 1월 1일부터 36년까지 2년간 282회에 걸쳐 동아일보에 <오천년간 조선의 얼>을 연재하여 민족혼을 진작시킨 일은 선생의 위대한 업적으로 손꼽힌다. 위당의 역사관으로 회자되는 ‘얼’사관은 민족정신인 ‘얼’을 중심으로 그 외적 발현인 역사의 진행과정을 검토하여 우리역사를 自尊·自主적으로 파악하려는 것이었다. 그의 사학이 민족주의 사학 혹은 唯心論사학으로 불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Ⅱ. 고대사 인식의 배경
위당의 역사연구 동기는 『朝鮮史硏究』下卷 附言에 다음과 같이 나타나있다.
“ 나는 국사를 연구하던 사람이 아니다. …그러다가 어느 해인가 日人들이 <朝鮮古蹟圖譜>란 첫 책을 내인 것을 보니 그 속장 二三葉을 넘기기 전에 발서 <분>한 마듸가 나타남으로 ‘이것 그냥 내버려둘 수 없구나’하였고 또 어느 해인가 제 소위 <병합몇주년>이라고 京日인가 每申인가 기념호를 내였었는데 소위 秥蟬碑의 사진이 소위 몇 해안 대표적 대사건의 하나로 올랐다. 이 石刻은 龍岡에서 처음 나타났다고 하여 용강이 秥蟬이라 하고 秥蟬은 漢郡 樂浪의 屬縣이였음으로 이로써 평양이 古樂浪의 郡治라고 떠드는 것이다. 이것을 보고 일본학자의 조선사에 대한 고증이 저의 총독정책과 얼마나 긴밀한 관계가 있는 것을 더욱 깊이 알아 ‘언제던지 깡그리 부시여 바리리라’ 하였다. 그 뒤 申丹齋의 朝鮮史硏究草가 들어와 그 眼識을 탄복하는 일면에 역내에 풋득풋득 도라다니는 種種의 출판을 퍽 한심하게 여기었으나 모다 한때 한때의 생각이었을 따름이요 제법 국사연구에 손을 대여 본 바 아니었다. …마츰 동아일보의 부탁을 받어 우리 정신방면에 도움 될 만한 往蹟을 連載하기로 하였는데 나는 부탁받은 範圍를 넘어서 한번 오천년을 나려 괴는 大著를 내여 볼 작정을 하고 <오천년간 조선의 얼>이라는 제목을 걸었었다.”
참고 자료
이만열 『한국 근현대 역사학의 흐름』2007
강만길 “우리나라 근대 역사학의 발달”『한국의 역사인식』下 1985
심경호 “강화학과 담원 정인보” 『어문연구』28권 3호 2000. 9
정진석 “정인보의 언론을 통한 민족정신 고취” 『어문연구』28권 3호
박홍식 “일제강점기 정인보 안재홍 최익한의 다산연구” 『다산학』 17호 2010
김기승 “식민지시대 민족주의 사학자들의 역사인식” 『내일을 여는 역사』 25호 2006